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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괴물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는 방법

by 엘샤랄라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 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

-프리드리히 니체




"He who fights with monsters

should be careful

lest he thereby become a monster.

And if you gaze long enough into an abyss,

the abyss will gaze back into you."


제시된 문장 만으로 사색을 더해 글을 쓰려 했다가

'심연abyss'이라는 의미에 대해서 문득

더 깊이 파헤쳐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단순히 '깊은 연못', 혹은

'나 자신을 비추는 자기반성의 시간' 그 이상의

어떤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가 아닐까.

오늘의 문장 앞에 자리잡고 있는 또 하나의 문장,

"괴물들과 싸우는 자는

그 자신 또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이 괴물들은 나의 눈 앞에 존재하는 타자 혹은 세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나의 심연 속 괴물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 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껍데기를 모두 벗겨낸 그 적나라한 실체에 대한 탐색은

쉽지 않은 일이고, 어쩌면 피하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이를 거침없이 스스로 까발림으로써,

완전히 새롭게 태어날 수도 있다.

<역행자>에서 언급되었던 '자의식 해체'의 과정이다.


'과거의 나'는 때때로 심사가 뒤틀려 있다.

베베 꼬여 있었다.

욕심이 많고 매사에 가장 돋보이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뜻대로 되지 않으면 세상 불행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학창 시절에야 주어진 환경이라는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주어진 공부로 승부를 볼 수 있었기에

최선의 나를 끌어올리는 경험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고,

세상에 나가 결혼할 즈음이 되니

내 힘이 닿지 않는 변수가 급격하게 내 삶을

흔드는 모습을 보면서 좌절하고 절망했다.

아주 열심히, 주어진 바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나의 심연은 탁했고, 가라앉았고, 출렁였다.

그러한 마음이 나를 가득 채우면

읽고, 걷고, 또 읽으며 나를 매만지곤 했다.

그 시간 덕분에 나는 나의 심연 속 '오만과 자만'을

가차없이 털어냈다.

한바탕 휘젓고 나면 찌거기가 가라앉고 물의 투명함이

되살아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안되겠다 싶어 물을 갈아 보기로 했다.

하나씩 바꿔 나갔다.

생활 반경이 있으니 사는 곳을 당장 바꿀 수는 없었다.

대신 집안을 샅샅이 바꿔 나가고 있다.

못보고 지나쳤던 얼룩까지 닦아 내고,

일정기간 교체하지 않았던 용품들을 바꿔나간다.

밥솥의 고무패킹부터 쓰던 반찬 그릇, 수건, 텀블러,

하나씩 새롭게 들이기 시작했다.

일어나는 시간대를 바꿨다.

강사일로 늦게 끝나니, 마무리하면 늦게잤다.

하지만 2023년 1월부터 기분내키면 하던 새벽기상을

조금 더 주기적으로 반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바꿨다.

집안에서 싸이클을 돌렸었다.

하지만 이제는 밖으로나가 거침없이 걷고,

조금씩 뛰기 시작하면서 산에 오른다.

사용하는 언어를 바꿔 나갔다.

십대들과 소통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종종 사용했었다.

이제는 소리를 낮추고, 목소리 톤을 바꿔 나가며

제대로 듣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말하기 보다 질문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기 브런치, 블로그, 워드라는

하얀 모니터 위에 얼마든지 써내려 갈 수 있다.

그리하여 내가 도달한 가장 큰 변화는

이렇게 매일,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의 자의식을 완전히 해체하고,

새롭게 재조직하는 일,

심연을 들여다보고 그 물을 관리하는 일은

매일 해야하는 일이다. 글쓰기를 통해서.

그래서 매일 쓰기 위해 새벽을 깨운다.

쓰고 싶어서 새벽을 깨운다.

그렇게 나의 심연 속 괴물들이 하나씩 죽여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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