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5학년, 둘째는 2학년이다. 올해 2학년이 된 둘째는 줄글책을 스스로 읽는다. 아이들과 함께 그림책을 읽어 볼 일이 없다. 아예 없다. 그림책을 손에서 놓기 아쉬워하던 중 도서관에서 신규 동아리 회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게 되었다. 그림책을 읽는 동아리는 맞긴 한데, 그냥 그림책이 아니라 영어그림책이다. 더 좋다. 신이 난 나는 첫 모임에 참석한 후 지속적으로 활동하겠다 신청하였다. 그리하여 3월부터 시작한 동아리 모임은 내 삶의 또 다른 활력소가 되고 있다. 매달 선정한 그림책 이외에 조금 더 두꺼운 원서도 쪼개서 읽고 밴드에 단상을 남긴다.
시험기간이 겹쳐 첫 번째, 두 번째 미션은 제 때에 올리지 못하고 이번 연휴 마지막날에 몰아서 올렸다. 책 제목은 <Hello, Universe!>다. 초반부 등장인물 중, Valencia라는 보청기를 끼는 소녀가 나온다.
"It's not the dark that keeps me awake. It's the nightmare."
그녀는 밤마다 악몽으로 괴롭다. 하지만 그녀를 깨우는 것은 어둠이 아닌, 악몽이다. 나는 이 한 줄에서 다소 의아했다. 나 자신에게 의아했다. 악몽은 밤에 꾸는 것이니까 당연히 어둠으로 귀결되는 사건이라 내심 단정 지었던 나의 사고방식에 균열을 내는 문장이었다.
분별없고 무자비하게 단어가 합쳐짐으로 이성적 사고가 힘을 잃고 감정이 우세해진다. 작은 일에도 기겁하여 놀라고, 평정심을 잃고 과도하게 반응한다. 올바르게 구분하지 못하고 한 주머니에 주섬주섬 끌어 모아 놓았으니, 그 큰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해졌다. 추측과 짐작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만이 남았다.
'내 인생의 목적'과 '목적지'도 그러한 단어들 중 하나였다. '인생의 목적'을 '목적지'라 생각했다. 내가 설정한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곧 인생의 목적이었기에, '이번만', '이번 한 번만', '여기까지는'이라는 단어들에 기댔다. 구체적인 목표가 주는 이점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에, 그 혜택을 누려 보고자 한 삶이다. 반 등수, 전교 등수, 학부생 시절 과석차, 사회생활 이후 내가 목표한 한 달 월급, 결혼 시기, 출산 시기, 이 모든 것들이 하나하나 나의 목적지였고 인생 목적이었다. 목적지에 도달하는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어도 기어코 도달하였다.
계획했던 목적지에 도달하였다고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삶은 계속되어야 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인생이 결코 슈퍼마리오 게임이 아니고, 매 순간 물리쳐야 할 쿠퍼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나는 마치 내가 도달해야 하는 목적지를 반드시 물리쳐야 하는 쿠퍼왕 취급을 해왔다. 흐르도록 두지 못하고, 길목마다 댐을 만드는 일에 열중한 셈이다. 흐르도록 두자. 나는 흘러야 한다. 때로는 세차게 또 때로는 잔잔하게, 우선 마음껏 흐르게 하자. 멈추지 말고 흐르자.
나는 '물'이었다. 마흔이 넘고 그 본성을 깨달았다. 마음껏 흘러 보겠다 마음을 먹자, 억지스러운 것들이 줄었다. 과도하게 친근하지도 혹은 냉담해지지도 않는다. 일과 휴식의 경계선도 흐릿하다. 주 7일 근무제라 할 수도 있으며 주 7일 나의 시간이라 할 수도 있다. 하루를 3교대로 근무하기도 하지만, 또한 온전히 내 시간이기도 하다. 시간의 우선순위에서 무엇이 우선인지 선택하지 못하고 엉뚱한 것을 선택하여 후회하는 일들이 줄었다. 스치듯 지나가야 하는 인연임을 알았고, 오래도록 길게 봐야 하는 인연임을 알아가고 있다. 읽어야 살고, 살아야 쓰기에 마흔 이후 사십 년, 혹은 오십 년 혹은 그 이상까지 오래 살 수 있으면 오래 살고 싶어졌다. 오래 살고 싶은 그 구체적인 이유들을 아직은 낱낱이 나열하는 수준까지는 모르겠지만, 꺼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촛불이 내 가슴에 켜진 것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