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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평화를 꿈꾸다 Jan 27. 2017

홀로코스트는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졌는가?

기억하지 않는다면 비극은 반복된다.

영화 사상 최고의 흥행감독은 아마도 스티븐 스필버그일 것이다. <ET>(1982), <인디아나 존스>(1984), <쥬라기 공원>(1993) 등 수많은 히트작을 만들어냈을 뿐 아니라 <트랜스포머> 시리즈를 기획하고, <인터스텔라>(2014)를 제작했다. 상업적인 면에서는 탁월한 활약을 보였던 그였지만 작품성까지 인정받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오랜 편견에 대해 한풀이를 하듯이, 그가 작품상, 감독상 등 아카데미에서 7개 부문을 석권한 영화를 들고 찾아왔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쉰들러 리스트>(1993)가 그것이다. 쉰들러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게 될 유태인들을 자신의 회사에 고용하는 형식으로 살려냈다. 때로 나치에 뇌물을 써가면서까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해냈다.  


출처 : 영화 <쉰들러 리스트>


대량학살의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매년 1월 27일은 ‘국제 홀로코스트 희생자 추모의 날’로 지켜진다.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을 해방시킨 날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유럽에 살던 900만 명의 유태인 중 2/3에 해당하는 600만 명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이상 유태인들을 학살하는 나치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 어두운 그림자는 아직까지도 세상 깊숙이 남아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 홀로코스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인종청소(제노사이드)의 한 예이다. 제노사이드(Genocide)는 민족(Geno)과 살인(Cide)이 결합한 말로 대량학살, 인종적 학살을 가리킨다. 민간인을 종교, 인종, 종파에 따라 사람들을 구분하고 의도적으로,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것은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한다. 이러한 인종 청소의 예는 전 세계에 걸쳐, 오랜 역사를 두고 반복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을 마친 뒤에도, 최근까지도 진행되고 있다.


이슬람 무장단체 IS는 이라크 북부 소수종족을 대상으로 인종청소 범죄를 자행했다. 이로 인해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민간인 사망자와 난민이 발생했다. 최근에는 미얀마군이 이슬람계 소수민족인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 청소를 시도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이로 인해 미얀마가 테러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점점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 철폐에 관한 국제협약'이 1969년에 발효되었고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인종 차별 철폐 위원회'가 유엔 산하 인권기구로 운영되고 있으며, 해마다 3월 21일은 '국제 인종 차별 철폐의 날'로 지켜지고 있다. 하지만 인종과 피부색, 민족 등으로 인한 구별과 배척은 여전하고, 평화롭고 평등한 관계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 차별과 그로 인한 상처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


출처 : 영화 <호텔 르완다> 


르완다의 비극을 통해 찾아보는 출구


<호텔 르완다>(2004)는 1994년 있었던 르완다 내전을 배경으로 삼는다. 르완다의 하비아리마나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격추되어 사망하자, 후투족 자치군은 대통령 살해를 빌미로 투치족을 닥치는 대로 살해하기 시작했다. '폴 루세사바기나'는 투치족 아내와 가족을 자신 일하는 호텔로 피신시켰다. 학살을 피해 피난민들도 이 호텔로 모여들었다. 호텔 지배인 폴은 후투족 자치군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100일의 긴 시간 동안 1268명의 사람들 목숨을 지켜냈다.


<내 이름은 임마꿀레>는 르완다 대학살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1994년, 22살 대학생이었던 임마꿀레는 부활절을 가족과 보내기 위해 미국에서 르완다로 돌아왔다. 그 사이 르완다 대통령의 암살이 벌어지고, 8명의 동료와 91일간을 숨어 지냈다.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인들이며 평소 이웃집에서 같이 자라온 사람들이었다. 임마꿀레도 이웃들에 의해 가족을 잃게 되고, 친구로 지내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내전 이후, 르완다 정부는 밀린 법정업무로 인해 범죄를 자백한 대학살 살인자 4만여 명을 풀어주기로 결정했다. 시간이 흘렀다고 하지만 상처는 잘 아물지 않았다. 피해자는 여전히 깊은 상처를 지니고 있으며, 가해자는 수치와 혐오감을 안고 살아간다. 이웃에서 적이 되었고, 그 적이 다시 이웃이 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용서와 화해의 길은 쉽지 않다. 인간성의 회복과 성숙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르완다가 직면했던 대량학살의 참상은 오늘날 지구촌 어디인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 진행형의 비극이다. 증오와 복수는 특정 시대와 특정 장소에서만 벌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들이다. 지배하고자 하는 권력욕, 부를 독점하고픈 탐욕, 인간의 갈등과 증오심이 있는 한 계속 진행될, 어쩌면 우리가 영원히 떠안고 가야 할 숙명 같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분열을 조장하여 그 안에서 자신의 이득을 누리는 자들도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출처 : 영화 <액트 오브 킬링>


학살이 남긴 상처를 보듬어가는 사람들 


1965년 인도네시아 군부정권하에서 100만 명을 죽이는 대학살이 발생했다. 죠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은 인도네시아 대학살과 관련하여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두 영화는 관점에 조금 차이가 있다. <액트 오브 킬링>(2013)이 가해자가 과거 자신의 행적을 찍은 것이라면, <침묵의 시선>(2014)은 피해자가 가해자를 찾아가 현재의 모습을 담는다.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가해자들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죄책감도 책임의식도 없었다. 단지 시키는 대로 명령에 따른 것이었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다. 자신들의 과오를 변명하고,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윤색시켜 놓았다. 자신들이 한 행동을 스스럼없이 재연하고, 자랑스럽게 설명한다. 하지만 이것은 트라우마와 수치심을 억압함으로 견디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가해자들의 절박함이 드러나는 또 다른 형태로 볼 수 있겠다.


형을 잃은 주인공은 여러 가해자들을 만나 사과를 받으려 하지만 계속 실패한다. 범죄에 가담한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공포와 죄책감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사과를 한 사람이 있었다. 이제껏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했던 가해자의 딸이었다. 그녀와의 포옹에서 이제껏 없었던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도 같은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죠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두 편의 영화는 우리에게도 교훈으로 삼을 수 있을 것 같다. 근현대를 지나오면서 진실을 밝혀야 할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다른 이유로 과거를 덮어두고자 한다. 그것은 아물지 않은 상처일 뿐, 평화도 아니다. 이 상태로 그러한 상황이 다시 일어난다면 학살은 반복될 것이다. 과거는 지나간 것이고, 이미 잊힌 것이라 여기기 쉽다. 그러나 우리의 몸안에 새겨져 있고, 우리 몸이 그것을 기억하고 있다. 누구도 거기서 숨을 수도, 탈출할 수도 없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배한다. 강요된 침묵, 체념해버린 침묵에서 벗어나 진실을 직시하고 성찰해야 할 것이다.


출처 : 영화 <침묵의 시선>



그들의 비극은 또한 우리의 문제이다.


르완다와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우리로부터 머나먼 나라의 사건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민족 간의 대립, 인종 청소의 문제는 교육 수준이 떨어지고, 문명이 뒤처진 곳에서만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탈식민과 냉전의 시절, 많은 나라들이 폭력과 학살의 역사를 겪었다. 영화를 통해 아시아 국가들의 어두운 역사를 반추해 볼 수 있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1989)는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대만이 겪은 혼란을 기록한 영화이다. 롤랑 조페 감독의 <킬링 필드>(1985)는 폴 포트와 크메르루주군이 1975년부터 약 4년의 기간 동안 인구의 1/4인 200만 명을 살해한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오멸 감독의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2012)은 제주 4.3을, 구자환 감독의 <레드 툼>(2013)은 보도연맹 사건을 그린 영화이다.


열강에 의해 나라를 잃고, 식민지배에서 독립을 하고, 곧 둘로 나뉘어 서로 총칼을 겨누고, 전쟁의 상처로 해결되지 않은 앙금은 자자손손 계속되고, 결국에는 서로 원수로 여기는 사례가 어느 나라, 어느 대륙에만 한정될까? 이런 역사는 우리에게도 익숙하지 않은가? 진심 어린 사죄와 용서, 그리고 화해는 그들만의 결론이 아니라, 우리 역시 찾아가야 할 여정이기도 하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증오의 악순환은 끝이 없기 마련이다. 아프지만 누군가가 먼저 사랑하고 품어줄 때, 그 고리를 끊을 수 있다. 증오를 이겨내고 진정한 용서와 사랑을 회복해 가기 위한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한 성숙함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그러한 성숙함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세상을 여는 기반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출처 : 영화 <지슬 - 끝나지 않은 세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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