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은한 마음으로 오래도록 지켜보는 것이 사랑이다
2017년 초, 집중호우가 페루를 강타했다. 20년 만에 발생한 최악의 홍수로 70여 명이 숨지고, 7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피해지역은 국토 절반이 넘었고,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수도인 리마는 상수원이 오염되어 수돗물 공급이 중단되기도 했다.
집중호우의 원인은 엘니뇨 현상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엘리뇨는 적도 부근의 해수 온도가 상승하여 발생한다. 이러한 현상이 크리스마스 때 일어났기 때문에 스페인어로 '아기 예수'를 의미하는 단어 '엘리뇨'가 쓰이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겨울에도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었다는 축복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지금은 전 지구적 이상 기온과 자연재해를 통틀어 부른다.
오늘도 지구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위기상황
페루가 물난리로 고통받고 있다는 뉴스와 함께 물이 모자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소식이 들려온다. 동부 아프리카의 기근은 유엔 창설 후 최악의 상태라고 한다. 소말리아는 가뭄으로 황폐해졌고, 내전을 겪은 남수단은 농업기반이 파괴되어 식량 부족이 극심하다. 이로 인해 아프리카 동부 4개국에서 2천만 명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라 한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은 국제사회가 힘을 모아 돕지 않으면 이번 세기 들어 가장 끔찍한 비극이 동부 아프리카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 지구적으로 보면 재난은 항상 우리 곁에 있다. 수십 년째 지속되고 있는 아프리카의 가뭄과 기아, 잊힐만하면 다시 찾아오는 화산 폭발, 지진, 쓰나미... 거대한 자연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깨닫게 한다. 자연현상만 재난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다. 각종 내전과 분쟁은 수많은 이재민과 피해를 만들어 내고 있다. 홍수나 가뭄이라는 자연재해와 함께 내전, 정치적 불안 등의 인재가 겹치면 고통은 몇 배로 커진다. 이러한 피해는 가난한 나라일수록 더 큰 상처를 남긴다.
자국 내의 사건사고만으로도 뉴스거리가 넘치는 오늘날, 언론은 멀리 떨어진 나라의 고통을 비중 있게 소개해 주지 않지만 사람들의 관심 여부와 상관없이 재해의 여파는 전 세계로 급속히 퍼지고 있다. 지구 온난화와 환경 파괴로 인하여 가뭄과 홍수 등 천재지변은 물론, 정치 경제적 갈등으로 전쟁 등 인재도 급증하여 난민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구호활동은 우리가 현실에서 맞이하는 각종 재난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행동이다. 재난 피해를 극복하고 재난 이전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야말로 긴급구호의 궁극적인 목표라 할 수 있다. 위기에 처한 이들이 최대한 빨리 일상에 복귀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여건을 우선 만들어 주려는 인류애적 연대이다.
쉽게 잊히는 고통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던 동남아의 쓰나미는 2004년, 아이티의 대지진은 2010년에 발생했다. 아무리 충격적인 재난이라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가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기부하고, 도움의 손길을 보냈던 그곳은 어떻게 변했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의 관심이 처음의 충격만큼 지속되지 못했음을 깨닫게 된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초기 대응이 중요하다. 워낙 열악하고 다급한 상황이다 보니 초기의 판단 착오가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재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막대한 비용이 든다. 긴급한 재난은 긴급한 후원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후원을 하고 나면 자신의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게 되고, 재난과 피해자들은 잊히기 일쑤다. 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오래가지 못하더라도 그곳을 지키는 사람들의 노고는 계속되고 있다.
긴급구호는 단계적으로 실시된다. 간단하게 '긴급구호', ' 재난복구', '개발'의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긴급구호에 머무른다. 하지만 그 이후의 단계가 훨씬 오래 걸리고 중요한 법이다. 현장에서는 이 기간을 5~10년을 잡고 있다. 한 지역이 총체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자체 역량을 만들어 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이 과정을 마치면 긴급구호팀은 더 열악한 지역으로 옮겨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
뉴스를 도배하던 재난조차도 쉽게 잊어버리는 것은 아마도 연결고리가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난이 벌어진 나라와 거리도 멀거니와 평생 단 한 번도 못 가볼지 모른다.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아는 것도 거의 없다.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매일의 삶에 치여 그들의 고통들은 잊히기 쉽다. 하지만 고통 받는 사람들의 삶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재난보다는 그것을 딛고 이겨낸 사람들에게 관심을
<더 임파서블>(2012)은 2004년 동남아시아 8개국을 강타한 쓰나미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 태국에서 크리스마스 휴가를 즐기던 실존 인물 '알바레즈 벨론' 가족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해변의 리조트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던 이들에게 갑작스레 바닷물이 덮친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흩어지는 가족들. 그들이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게 된다.
보통의 영화가 다루는 재난은 거대한 스펙터클이다. 볼거리를 내세워 관객들을 극장으로 끌어모은다. 이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각종 특수효과와 CG가 사용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여긴 것은 압도적인 재난이 아니라, 그 재난을 극복해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은 사랑과 희망, 인간미였음을 알려주었다.
영화는 재난을 겪고 살아남은 이들에게 엄습한 두려움을 숨기지 않았다. 엄마 마리아는 쓰나미로 인해 심한 부상을 입고 목숨이 위태하다. 큰아들 루카스는 상처 입은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도와주다가 병원에서 엄마와 헤어질 뻔한 경험을 했다. 아빠 헨리는 잃어버린 아내와 아들을 찾기 위해 수고를 하다가 겨우 목숨을 건진 두 아들마저 잃어버릴 뻔했다.
쓰나미라는 거대한 재난으로 인해 사람들은 고통의 현장에 던져졌다. 마주하는 모든 상황이 양심을 시험당한다. 큰 부상을 입은 엄마와 큰아들 루카스는 기진맥진한 상황에서도 위기에 처한 또 다른 어린아이의 목숨을 구한다. 주민들은 위기에 처한 이들을 구하여 병원으로 호송한다. 조금 더 차를 기다려주고, 전화기를 빌려주는 사소한 일들이 위기시 빛을 발한다.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향한 조그마한 선의와 자비가 모여 생명을 구하고, 기적을 만들었던 것이다.
잊지말아야 할 것, 잃지 말아야 할 것
배우 김혜자 씨는 국제구호기구인 월드비전의 친선대사를 맡아 오랫동안 봉사해 왔다. 1992년부터 월드비전과 처음으로 에티오피아에 방문한 이래로 거의 매년 빠짐없이 아프리카를 방문하고 있다.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2004)는 우간다, 보스니아 등 전 세계를 다니면서 전쟁과 기근, 가난과 질병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보고 그들의 고통당하는 모습을 책으로 기록한 책이다.
책이 나오고 10년이 훨씬 지났다. 그 사이 많은 연예인들이 위기에 처한 나라들을 찾아갔고, 현지의 상황을 전해 왔지만, 이 책만큼 호소력을 보이고, 반향을 일으킨 적은 없던 것 같다. 책을 읽다 보면 지구상에는 여전히 열악한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과 나의 작은 도움이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서 언급했던 전쟁, 기아, 에이즈 고아, 소년병, 아동노동, 조혼 등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는 도움의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하지만, 하루 아침에 해결되는 문제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일도 아니다.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겪고,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었다가 다시 일어선 나라를 증거로 가지고 있다.
김혜자 씨가 봉사하는 월드비전은 우리나라와 인연이 깊다. 한국선명회(현 월드비전)는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고아들과 남편을 잃은 부인들을 도우며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월드비전은 1991년에 이르러 외국 원조를 받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게 되었다. 이제는 대규모의 재난 현장에서 UN기구 등과 파트너로 구호활동을 전개해나가고 있다.
수없이 발생하는 자연재해와 갈등 상황 아래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는 일이다. 맹자는 인간이 지닌 4가지 본성 중의 하나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말했다. 그것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다. 세상은 돌고 돈다. 그 언젠가 우리 역시 재난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도운 것처럼 그들도 그때 우리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