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 생태계에서 헤엄치는 IT 디자이너의 일기 - 7
외국인 동료와 해외 지사, 제휴 회사와 협업하더라도 사실 그렇게 막 영화나 드라마처럼 엄청 대단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어쨌든 내가 머물고 있는 곳은 한국이었으며, 특히 그냥 나는 일개 직장인이었으니 제 아무리 회사에서 무엇을 해봤자 모두 일반 업무의 일종일 뿐이었다.
그래서 5번째 일기장에서 열심히 공부했던 외국어 또한 아직은 리더급이 아니라 직접적 발언을 많이 하는 미팅이 잦은 것도 아니어서 실제로 크게 쓸 일이 잘 없기도 했다. 그렇게 별다른 뚜렷한 성과 없이 하루하루 어찌어찌 보내면서 점점 매너리즘에 빠져가는 나 자신을 바라보니 곧장 현타가 오더라.
내가 뭐라고. 결국 난 그냥 회사의 부품일 뿐이야.
그날도 어떻게 보면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배당된 프로젝트가 생각보다 규모가 있어 조직장님도 슬슬 신입 티를 조금이나마 내가 벗었다고 생각했는지 이 업무를 주셨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다른 선배분들이 하셨던 프로젝트와 결이 크게 다른 작업이 아니었기에 특별하게 도전(?)이랄 것은 없었다. 그래도 있는 선에서 그나마 내가 디벨롭시킬 수 있는 것들이라도 해보자라는 생각에 나름 최선을 다해보고자 다짐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의 프로젝트는 조금 독특했던 것이 보통은 사내에 해외와 직접 소통하는 팔로우 업 담당자가 있기에 한국 법인 내 디자이너들은 그들과 소통하면 되었지만 그때는 그 담당자가 정식 미팅 외 업무 소통 공간에 나까지 초대하여 해외 마켓 담당자 즉, 외국인과 직접 소통하게끔 기회를 마련해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담당자가 동시 진행해야 하는 업무가 당시 너무 많아 자신이 중간에서 일일이 다 팔로우 업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그때는 조금은 특별 케이스(?)로 그렇게 나와 그들 사이를 직접 연결한 듯하다. 굉장히 떨떠름한 일이었지만 이게 어떻게 보면 내가 입사 전부터 그려왔던 업무 그림이었기 때문에 딱히 나도 싫진 않았다.
오! 드디어 우리 사내 외국인 동료가 아닌 다른 회사의 외국인분을 만났다! (단순)
처음에는 외국인 그것도 다른 회사분이라는 점에서 긴장도 많이 했지만 다행히 상대 담당자분이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따뜻하게 리액션해 주시는 모 드라마의 봄날의 햇살 같은 분이었어서 초반의 긴장은 잠시였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부터 냉혹한 업무 환경에서 잡초처럼 끈질기게 자라났던 턱에 가뜩이나 긴장될 해외 프로젝트에 이런 햇살 같은 분을 만나 지금도 다행이지 싶다.
번역기의 도움을 8할 이상 받았지만 드디어 공부했던 것에 기회가 온 것인가 싶어 어설프게나마 그동안 실력을 쌓아 올린 외국어도 맘껏 써보기도 하고 이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 것에 초반에는 햇병아리처럼 이거 저거 다 신기해서 재미있어했다.
그러나 사실 그 담당자도 일처리가 막 엄청 깔끔하고 소위 일잘알 스타일은 아니셨다. 저번 이야기에서도 풀었듯이 한국과 다른 나라와는 업무 속도나 방식이나 여러모로 차이나는 점이 많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감안하고 일해도 반복적으로 힘든 점은 분명 있었다. 그러나 이분과 일하면서는 오히려 어떤 부분에서는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 지점을 바꿔준 분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위에서 의사결정 되어야 할 부분을 빨리 처리해서 내려온 결정을 받아 작업물에 적용시키는 방식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 생각한 나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그 의사 결정은 굉장히 느렸고 해외 담당자분도 진행 사항에 대해 번복하거나 혹은 나에게 전달되어야 할 내용을 누락하는 경우도 있어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었다.
그러다 차라리 그 시간에 대략의 현지 분위기는 들었으니 내가 제안할 수 있는 건 따로 해보면 오히려 이 핑퐁 하는 단계가 줄어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의사결정 단계가 너무 오래 지체되어 사실 기다리기만 했으면 지쳤을 텐데 당시 나는 갓 신입 티를 막 벗은 나름 젊은 피(?)였기 때문에 그 늘어지는 시간을 활용하여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내보고자 한 것이다.
아휴, 답답해! 내가 일단 만들어서 뭐라도 보여주면 좋다, 싫다 말은 하겠지!
뒤늦게서야 알고 보니 오히려 상대편 쪽은 우리 쪽에서 그냥 작업물 전체를 컨트롤해 주길 원했던 것이다. 패기롭게 아예 작업물을 대략 만들어 보여주니 너무 허무하게도 이게 좋다며 그렇게 그대로 콘셉트 방향이 정해져 버렸다. 보통은 작업할 때 그렇게 하면 상대편 의견을 들어보지도 않고 강요하는 분위기가 될 수도 있고, 특히 이번에는 법인-지사끼리가 아닌 제휴 회사였기 때문에 더더욱 조심할 필요도 있었다.
스스로가 못 알아차렸던 걸 수도 있지만 상대편 담당자가 뾰족하게 커뮤니케이션하는 분이었다면 제 아무리 의사결정이 늦어져 시간이 빈다 한들 내가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기본적으로 따뜻하게 커뮤니케이션하시는 분이라 그런지 나도 모르게 내 의견을 지지해 줄 것이라는 조금이나마 믿음이 있었던 거 같다.
그러면서 이것도 역으로 생각하면 상대편 또한 내가 움직여주길 기다려 준걸수도 있겠다 싶었다. 제휴 회사라 내가 조심스러워했던 거처럼 상대편도 '그쪽에서 우선 알아서 해줘 보세요(?)'라고 한다면 이것도 뭔가 그림이 지시하는 것도 아니고 애매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세상에 모든 장점도, 모든 단점도 없구나.
평상시 답답해하던 느린 의사결정 단계가 오히려 실무자급에서 이런저런 아이데이션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고 뭔가 똑 부러지는 느낌은 없었던 담당자 또한 자신의 의견을 강력히 내세우는 대신 내 작업물을 좀 더 믿고 밀어주는 모습도 보여주어 이때의 계기로 위 문장과 같은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사내에서 조직장이나 리더 분들 혹은 거기까지 아니더라도 동료분들에게도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다면 꽤나 자신이 인정받는 느낌이 들 것이다. 실제로 나는 타 직무 동료분으로부터 내가 믿고 일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땐 정말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나라 사람도 아니고 해외 다른 나라 사람한테 그 얘기를 듣게 될 날이 오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었다.
그런 건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주인공들이 듣는 말 아니었나?!
당시 진행했던 프로젝트에서 내 디자인을 제휴 회사 분들이 보시고 굉장히 만족하셨다며 내부적으로 논의한 끝에 이벤트를 연계해 내 디자인을 본뜬 오리지널 선물 상품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 나에게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저 햇살 담당자분이 평소에도 나에게 기운 북돋아주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는 편이라 그 정도로 내부 분들이 만족하셨다고 부풀려서 말씀하시는 줄 알았다.
쨔잔!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실제 제작된 상품 이미지가 나에게 전송되어 이번 이벤트 때 배포될 것이라고 이 모든 것들이 실제 상황이라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나는 정말 좋은 의미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니, 진짜였어?? (안 믿었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그 디자인은 기본 화이트톤 소스들이 너무 정적인 느낌이 강해 그것을 중화시켜 줄 겸 파스텔톤의 다채로운 꽃잎들이 많이 날리는 느낌으로 화사하게 만들었는데 그때의 선물 상품 또한 내가 쓴 꽃잎색까지 비슷하게 맞춰 상품이 디자인된 것을 보고 정말 그때는 정말 눈물이 한가득 났었다. (당시에 아직 나는 회사 업무 환경에 적응하려고 힘든 시기를 보낼 때라서 감정이 더 여려있어서 그럴 수 있다.)
정말 그 당시 나는 신입 티는 조금 벗어났을지언정 좌충우돌 주니어였고 사실 한국 내에서는 그 누구도 나에게 이런 속 깊은 칭찬을 해준 적이 없었다. 나에게 같이 믿고 일할만한 동료라는 칭찬 또한 근속 기간이 거진 10년이 되어서야 들을까 말까 했으니 경력이 짧은 주니어 때는 사실 더더욱 그럴 일이 없었다.
항상 실력에 부족함을 느꼈고 매일같이 나는 한 사람분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걸까 싶은 자괴감과 함께 내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길이 어쩌면 내 길이 아닌데 내가 억지로 붙들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방황 등등 모든 사람들이 겪는 혼란의 소용돌이 안에 그저 버티며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해외의 한 회사가 내 디자인이 좋다며, 감명 깊었다며, 그것에 영감 받아 심지어 새로운 오브젝트로 만들기까지 한 그 사건은 잘하고 있다며, 내가 이 일을 계속해도 된다며, 그렇게 힘들게 버티던 나에게 소용돌이의 비바람을 막아주고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터주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은 짧게는 단순히 기분이 좋을 일이겠지만 길게 보면 정말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그날의 계기로 오늘도 나는 디자이너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갈 길은 멀지만 적어도 이 길에 대한 마음속 의심은 없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도 해외의 그 회사와 햇살 담당자에게 깊은 감사인사를 드린다.
그리고 내가 받은 이 선물을 다른 누군가에도 내가 선물해 줄 수 있길 바라며 이번 이야기의 끝을 맺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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