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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스 else Jul 10. 2023

먼 나라 이웃나라, 그냥 다 멀다

다국적 기업 생태계에서 헤엄치는 IT 디자이너의 일기 - 6


이 나라가 원래 이런 곳이었나?


6번째 일기장까지 와서야 드디어 다국적 기업의 에피소드 다운 에피소드를 풀게 된 거 같다. 각 프로젝트마다 연결되어 있는 시장 국가가 다른 경우 그때마다 작게든 많게든 대륙별로 해외 다른 나라의 지사 혹은 제휴 회사와 협업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드라마나 선배 직장인 분들의 무용담(?)처럼 멋진 일들로 가득할 거 같은 희망찬 청사진에 마냥 들떠있었던 걸 기억한다.


한국인은 '빨리빨리' 문화를 가지고 있는 만큼 신속한 것을 좋아하며 다소 성급한 면도 있다.


위와 같이 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인에 대한 인상처럼 나도 어쩌면 해외의 다른 나라에 대해 그동안은 일종의 어떠한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몸소 겪어보니 그것들도 어떻게 보면 내가 가진 선입견 혹은 편견일 수도 있겠다 싶은 지점이 많았다.


물론 우리 한국인들도 모두 다 같은 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 이후 풀어낼 이야기에서는 필자가 겪은 일화들 한정의 개인적 감상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감안하여 읽어주길 바란다.





한없는 짝사랑과 같다.


가장 처음 아무래도 크게 느꼈던 것은 다른 나라와 한국의 업무 속도 차이였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은 상대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비해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고, 또 사업 속도를 위해서라면 저녁 워라밸은 커녕 야근과 주말 출근도 불사하는 조직 문화가 많은 나라였다.


나 역시도 신입 시절 특히 업무가 미숙했을 때는 새벽에 집에 들어가는 것이 일상이었고 주말 출근해서 평일처럼 근무하던 때도 빈번했다. 솔직히 이때 너무 힘들었고 지금 생각해도 비정상적인 근무 환경이었지만 그때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전 이야기들에서 풀었던 특수한 조직 환경으로 인해 더더욱 제대로 업무를 처리할 수 없어 억지로라도 참고했어야 했다.


그렇게 주말까지 억지로 맞춰서 작업해 다음날 월요일이 되면 정말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작업물을 보내면 다른 나라들은 빠르면 2~3주, 늦으면 정말 몇 달 뒤까지도 관련해서 피드백이 없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고백하고 짝사랑 상대의 답장을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심지어 오픈 직전까지도 제대로 된 진척 상황이 해결 나지 않아 한국 법인에서 일단은 오픈시키고 그 당일이나 그 주에 긴급으로 수정한 적도 있었다.


도대체 한국은 뭐 하러 이렇게까지 혼자 촉박하게 막 이러는 거지?


이런 일이 한 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반복적으로 발생되었기에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힘이 쭉 빠졌다. 언제 한 번은 다른 동료분께 이러한 답답한 감정을 털어놓으니 다른 나라랑 일할 때는 정말 속된 말로 '뇌를 빼놓고 일해야 한다'라고 요상한 조언을 해주시기까지 했다.


당시 힘겨움에 이럴 거 같으면 우리 한국도 그들 나라의 속도에 맞춰서 하면 되지 않겠냐고 하니 그나마 한국이 멱살 잡아(?) 이렇게까지 끌고 가서 서비스 오픈하고 운영하는 거라 그들 속도에 맞추면 몇 년이 지나도 아마 프로젝트가 제자리걸음 일거라고까지 하더라..


아니, 진짜 그 정도였냐고..


왜 한국이 전쟁 후 폐허가 된 나라를 단 몇십 년 만 안에 IT강국 반열까지 올려놓은 '한강의 기적'을 보여줬다고 그러는지 이때 나는 정말 뼈저리게 피부에 와닿았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더 놀랄 수밖에 없었던 점은 같이 협업한 나라들이 소위 말하자면 세계의 선진국들도 많았기 때문에 그간 내 머릿속에 있었던 그 나라 각각의 이미지가 사실 다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업무 처리 속도는 둘째 치고라도 그래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들의 일처리는 깔끔하고 명확하게 할 줄 알았는데 그마저도 처참히 부서뜨려버려 어떻게 이렇게 일해서 세계적 명성을 꿰찬 건가 싶어 놀란 적도 많았다.


물론 이건 그 나라 전체, 그 기업 전체 사람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닐 테지만 나 또한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다 보니 왜 동료분이 '그냥 생각을 하지 말고 뇌를 빼놓고 일해라'라고 말씀해 주셨는지 이해가 되었다. 특정 나라, 특정 기업을 언급하기가 조심스러워 두리뭉실하게 묘사하다 보니 잘 안 와닿는 사람도 있을 거 같아 한 예로 자세히 풀자면 아래와 같은 일이 있었다.



*해당 예시는 이해를 돕기 위해 각색하였으며 실제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한 번은 초기 킥오프 미팅에서 전반적인 프로젝트 콘셉트와 작업 방향성에 대해 브리핑을 듣다 어떤 한 부분에서 작업 시 문제가 될 소지가 클 것으로 예상되는 오브젝트 요소가 보여 그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예로 설명하자면 디자인 오브젝트의 각 컬러가 초기에는 아래와 같이 설정되어 있었다.

같은 컬러 구성에서 비중만 다르게 설정해도 컬러가 주는 느낌이 다르다.


그리고 블루와 레드 계열은 강렬히 대비되는 컬러 조합 중 하나였기 때문에 여기서 화이트를 완충 느낌으로 넣길 원하는 논의가 오고 갔다. 그러나 당시 콘셉트 방향성에서는 화이트가 들어가면 디자인 분위기가 콘셉트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서브 컬러로 화이트를 넣게 되면 메인 컬러 수준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텐데 향후 그 부분을 수정하게 되면 아예 처음부터 작업을 다시 하게 될 수도 있는 중요 포인트였다.


당시 우리 디자인 조직에서는 이에 대해 관련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설정할 필요성이 있음을 지적했으나 협업했던 해외 제휴 기업에서는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될 소지로 보지 않는다며 결국 A안 방안으로 제작할 것으로 우선 협의하였다.


이 이야기 시리즈를 꾸준히 읽어온 독자분들이라면 한 가지 눈치챘을 법 한데, 이전 이야기들에서 이 회사와 조직에서 업무 할 때 아주 중요한 자세가 무엇이라 했는지 기억하는가.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믿지 말고 의심하고 또 확인하자.



A안으로 가자고? 응, 아니야.


나는 사실 초기 협의 내용을 단 한 줄도 믿지 않았다. 본능적이든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든 직감적으로 분명 이는 수정될 것이라 예상했고 다른 작업자들과 달리 애초에 처음 작업할 때부터 레이어와 세부 요소들을 다 분리해서 수정하기 쉽도록 파일들을 사전에 미리 손을 써두었다. 그렇게 A안을 반영한 디자인은 초반 컨펌을 위해 적당히 표면적인 작업만 해두고 변경될 디자인을 미리 선 작업을 해두고 있었다.


소위 말하자면 잔꾀를 부렸다.


아니나 다를까 몇 주후 오픈을 얼마 남기지 않고 아주 당연하듯 제휴 기업 디렉터가 협의 내용을 180도 바꾸는 청천벽력의 소식이 들어왔다. 말 그대로 초기 협의 내용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다행히 나는 이미 신입 시절에 씨게(?) 당한 적이 많아 이럴 경우를 대비해 사전에 준비해 둔 변경 디자인 파일로 피드백 내용에 맞춰 최종 수정을 했어서 큰 고난은 겪지 않았지만 이 정도 국력을 가진 기업이 왜 이렇게 허술하게 일하는 건지 참 궁금할 따름이었다.




한국인들이 모두 다 한국 드라마에 나오는 연예인처럼 잘생기고 예쁜 게 아닌 거처럼 선진국이라고 모두가 다 깔끔하고 합리적이고 명확한 일처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후진국이라고 생각했던 곳보다 더 너저분하게 일할 때도 있었으니 세계는 넓고 일률적으로 단정 지어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런저런 경험으로 몸소 배우게 되었다.





스피드 한 줄 감상평.


그래도 조금이라도 몇몇 나라에 대한 내가 느꼈던 협업하기 이전과 이후 인상을 간단히 풀자면 이런 것 같다. 앞서 말했듯이 지극히 필자의 제한적 경험에서 느낀 주관적 감상이니 일반화는 삼가 주길 바란다. (추가로 회사 프로젝트와 개인 사이드 프로젝트 전부 포함한 감상평이다.)



일본 
Before : 장인정신의 깐깐함과 아날로그 나라답게 보수적인 기업의 이미지
After : 아니, 이렇게 워라밸을 잘 챙기고 자유롭게 일해?? 


(총평 : 생각보다 휴가를 길게 그리고 자주 간다. 그래서 그런지 업무 확인이 뒤로 자꾸 밀... 나무늘보 st)


미국
Before : 뉴욕의 바쁘고 철두철미한 이미지와 실리콘밸리의 이미지로 엄청난 일천재가 가득한 이미지.
After : 의외로 캘리포니아의 느긋한 느낌에 되게 허들이.. 낮네? 그런데 돌다리를 엄청 두들기네?? 이걸로 커버하는 건가?? 아, 그런데 돌다리 그만 두들겨줘... 


(총평 : 걱정 많고 잔소리 많은 삼촌 같은 약간의 이슈 집착형 st)


중국

Before : 꽌시 문화처럼 몇 번 같이 일하고 얼굴을 튼다면 호방하게 같이 일할 수 있을 거 같은 이미지.

After : 뭐가 전부 다 안된다고 하냐.. 


(총평 : 약간 그 나라 정치 성향도 반영되어서 그런지 통제형 st)


영국

Before : 일본과 비슷하게 깐깐하고 보수적이고 딱딱할 거 같은 이미지

After : 계속 좋아요~ 러블리~ 좋아요~라고 하네? 


(총평 :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밝은 이미지. 칭찬할 때는 화끈히 칭찬하고 지적할 때는 냉철한 st)


태국

Before :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더운 나라 이미지가 있어서 그런지 느리고 수용적일 거 같은 이미지.

After : 어.. 우리 사업인데 더 적극적이고 의욕이 넘치네??


(총평 : 생각보다 열정 가득한 불타오르는 영업왕 st)


등등.



우리와 너무도 멀고 또 다른 나라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가 좋은 점도 있지만 너무 촉박하게 사람을 옥죌 수 있다는 단점이 될 때도 있기에 한국과 우리 회사가 일하는 방식이 전부 다 맞는 것도 아니고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해외 다른 나라의 문화나 일하는 방식도 사실 전부 틀렸다고 볼 수도 없다.


물론 가끔씩 오는 문화적 충돌에 놀라기도 하지만 같은 한국인끼리 일할 때도 서로 업무 스타일이 다르면 때로는 다투면서 맞추기도 해야 하니 시간이 흘러 해당 국가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견문이 넓어지면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던 일도 나중에는 100% 이해되는 건 아니어도 어느 정도 대비하여 같이 협업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이전과 다르다면 예전에는 어린 마음에 막연하게 그래도 몇 번 일 같이 하게 되면 '우리는 지구촌 친구~'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다른 나라와 일한다는 것은 서로 이익이 되는 부분만을 맞춰 사업을 해나가는 것인 만큼 국가 외교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그렇기에 더 기대 심리와 같은 것들은 내려놓고 우리 사업의 이익에 좀 더 초점을 맞춰 국내 사업보다도 더 감정을 빼고 일해야 했다.


그런 국가적 줄다리기를 하면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그런 꿈같은 일은 역시 없는 거겠지'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도 뜻밖의 생각지 못한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되는 데 아직도 그 일은 인상 깊어 다음 이야기에서 좀 더 자세히 풀어보고자 한다.



*표지 이미지 출처 - Freepik Free Licen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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