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스 else Jun 29. 2023

우리 회사는 NO답이라는 생각

다국적 기업 생태계에서 헤엄치는 IT 디자이너의 일기 - 4

*본문에 삽입된 사례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해와 보안을 위해 일부 각색하였습니다.



양날의 검에 베어진 아킬레스건.


실무자를 단순 지시를 내려받는 직원이 아닌 하나의 프로라고 여겨주며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환경. 


언뜻 들으면 매우 혁신적인 업무 환경이었지만 장점이 매우 큰 만큼 이 환경이 단점이 될 경우 오히려 사람을 고립시키고 심리적으로 위축시켜 병들게까지 하는 그 역기능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분명 기업과 조직에서도 이런 결과를 초래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 텐데 어쩌다가 이 '양날의 검'은 조직과 구성원 모두에게 휘둘러져 자상을 남기게 되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시스템의 부재로 어떻게 보면 전부 다 피해자인 동료들끼리 서로를 치고받고 할 수밖에 없게 되었을까.


이 업무 환경은 이제 더 이상 조직의 '혁신'이 아닌 '끊어진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렸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여기에 일조한 것은 가장 개선이 시급한 요소 세 가지가 있었다. 이는 언어를 순화했지만 사실 진짜 심정은 아래 문장과 같다.


와! X노답 삼 형제다!


몇몇 동료분들이 이 내용에 공감해 주셔서 같이 개선시켜 보고자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우선적으로 우리가 할 일은 이 현상이 왜, 어떻게 벌어졌고 또 고착화되었는지에 대한 원인 분석이었고 그 일련의 과정이 다음 내용이다.





무관심, 무책임, 무기력의 삼 형제.


이전 언급한 같은 조직 내에 사수-부사수 시스템이 없기 때문에 사전에 프로젝트 진행 시 가이드라든지 주의할 점을 전혀 얻을 수 없었고 기존 직원들에게 질문한다 하더라도 프로젝트별로 쌓인 특징이나 히스토리가 달라서 그들도 쉽사리 관련 정보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상위급인 팀 리더나 조직장에게 물어본다 해도 이 사안에 대해 논의할 만한 프로젝트 팔로우 업 협업자를 나와 이어 줄 뿐이었다.  


그런데 더 웃픈 것은 다른 조직의 그 협업자들도 나와 비슷하게 끌려온(?) 처지라 그들도 관련 내용에 대해 잘 몰랐고 나와 같은 직무가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로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나뿐만이 아닌 프로젝트의 실무자 대다수가 서로서로 아는 것이 없어 뒤늦게 이슈가 터져 나와 수습하는 일이 잦았다.


어? 너도? 야! 나두!




1. 삼 형제 첫째, 무관심

모두가 거의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어서 기존 실무자들은 그들대로 정신없고 나를 포함한 신규 실무자들은 그 나름대로 정신없어 눈앞에 내 할 일만 처리하기 바빠 분명 유기적으로 다 연결된 사업일 텐데 조직 전체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건지 알 수도 없고 또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 '무관심'으로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되니 이 과정이 굳어져 버려 문제가 계속 터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누군가 처음 포문을 열었기 때문에 프로젝트가 진행 중일 텐데 상위 조직장급이든 혹은 컨트롤 타워인 프로젝트 매니저(PM)이든 누구라도 관련 내용을 뚜렷이 알지 못하고 하나같이 모두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처음에는 납득되지 않았다.


후에 짐작한 것은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초기보다 많은 수의 실무자들이 참여하게 되자 사업 속도가 빨라지면서 여러 내외부적인 이슈들로 논점이 시시각각 변해버려 그 프로젝트를 처음 추진했던 상위급들조차 나중에는 진행 과정의 실시간 공유를 따라가는 게 늦어 히스토리가 꼬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2. 삼 형제 둘째, 무책임

그러다 보니 실무자들은 주체성도 좋지만 어느 정도 리더급에서 무언가 이끌어줬으면 하는 것도 있는데 리더급에서는 자신들의 손을 너무 떠나버린 듯한 프로젝트 상황에 어차피 주체는 실무자들이기도 하니까 그들에게 좀 더 주도권을 너무 넘겨버린 것도 있었다.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는 리더급의 너무 '무책임'한 태도로 오인하게 되는 지점이었다.


*초록색 - 필자


팀장님, 이 기획 부분은 법무 이슈로 변경해야 돼서 해당 디자인 부분을 이렇게 변경하기로 했습니다.


땡땡씨, 그거 국가 기념일에 맞춰야 한다고 기획 쪽에서 초기부터 얘기했던 거라 바꾸면 안 될 텐데요?


네?? 저는 그 내용은 기획 쪽에서 공유받지 못했는데.. 일단 기획자랑 다시 한번 더 얘기해 보겠습니다.



왜 이 중요한 내용을 처음부터 안 얘기해 준 거지..

그리고 기획자는 왜 기획 콘셉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데 왜 몰랐던 거지..

(왜냐면 기획자도 그쪽 조직에서 공유받지 못했던 거다..)

다들 왜 이렇게 무책임한 거야..




3. 삼 형제 셋째, 무기력

결국 이런 일련의 사태를 계속 반복적으로 겪는 실무자들은 속된 말로 전부 다 질려버렸다. 아무리 스스로 노력해 보려고 해도 너무 기초적인 사안으로 혹은 너무 어이없는 이유로 자꾸 프로젝트가 수정, 연기, 무산이 반복되었고, 특히 가장 문제인 것은 처음부터 언급했던 모두가 원활한 히스토리와 이슈 공유가 이뤄지지 않고 제대로 된 가이드도 없어 각자가 서로 따로 놀고 서로 고립되어 버려 '무기력' 상태에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뭐.

지금까지도 그렇게 해왔잖아?


어떻게 보면 모두들 포기해 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가이드도 없고, 히스토리도 모르고, 이슈 공유도 할 수 없었나 보다.





나를 시작점으로 하자.


이미 그때는 많은 분들도 힘든 점은 성토하긴 했지만 위에서 언급한 무기력 상태에도 동시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해결책을 내는 것은 어려워했다. 더군다나 일부 몇몇이 조직 전체의 구조와 일하는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사실 무리가 있었다. 그럼 일단 나 자신 그리고 나와 긴밀하게 일하는 한두 명의 실무자들끼리만이라도 이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휩쓸리지 않도록 보호 장치를 구축해 보자는 것이 의견 중 하나였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을 믿지 말고 의심하고 또 확인하자.



- 혹시 관련 이슈 확인 및 처리 방법이 어떤 순으로 흘러가는지 과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 해외 현지에서 나오는 이슈들은 전부 무조건 반영해야 하는지 아니면 저희 한국 쪽에서 커트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부분이 있을까요?


- 저번 달에 있었던 그 이슈는 그때만 특수한 경우였나요, 아니면 평상시 흔히 발생되는 경우인가요?



그리하여 그때부터 가장 큰 혼란을 야기하는 잘못된 정보 공유의 개선을 위해 약간 변태처럼 모든 것을 의심하고 전후 맥락을 집요하게 파헤쳐서 기록해 두는 움직임을 실행했다. 설명이 약간 사이코스럽지만 풀어서 설명하자면 프로젝트 진행 중 사건사고가 발생했다면 비단 디자인에서의 이슈가 아니더라도 발생부터 해결까지 일련의 과정을 기록해 두었고 다른 직무 협업자가 어떤 내용을 공유를 해줘도 그것이 확정임을 믿지 않고 번복할 가능성을 거의 99퍼센트라고 가정하에 업무를 수행했다.


그렇다고 이 말은 동료를 신뢰하지 않고 배척하라는 뜻은 절대 아니다.


물론 기획 이슈이면 담당 직무인 기획자가 제대로 해줘야 하는 부분이 맞지만 그렇다고 나 또한 그걸 손 놓고 마냥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중에는 다른 사람 탓만 하게 되는 자기 연민적 태도를 경계해야 함의 이야기이다. 실제로 나는 물론 타 협업자가 잘못된 직무 수행으로 피해를 봤지만 그분도 일부러 그런 게 아닌 나와 비슷하게 소속 조직에서 고립된 채로 혼자 아등바등 일한 터라 여러 문제가 발생된 것이었는데 초반에는 그 사실을 잘 몰랐기에 해당 동료에게 부정적 감정부터 쌓였기 때문이다.


내로남불이었다..(반성)


그렇기 때문에 나를 먼저, 나를 시작점으로 잡아, 나부터 변화해야 했다.





이것이 나비효과인가?


매우 구체적인 일자와 프로젝트명, 해당 이슈가 벌어지게 된 과정들 그리고 대응법 등을 정리하며 디자이너인 나는 사실 PM은 아니었지만 마치 해당 프로젝트의 컨트롤 타워처럼 흉내라도 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태(?)적으로 모아두었던 나의 기록과 가이드들이 향후 조금씩 긍정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눈에 보였다.


*초록색 - 필자


[기획 파트]


뫄뫄씨, 이거 이전에 XX년 XX월에 XXX프로젝트에서 CS 쪽 컴플레인이 들어와서 소비자 기만행위로 금융당국에 지적받은 사항이라 배포내용과 개수가 일치하지 않으면 디자인에서도 다 변경해야 할 소지가 발생될 거예요. 오픈일을 한 번 조정해 보시고 변경이 불가한 사안이면 주의사항 문구 추가 등으로 우회 방법이 있을지 알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저도 저희 쪽 조직에서 과거 그런 이슈가 있었던 걸 공유받지 않아 몰랐는데 고맙습니다. 해당 부분 다시 확인한 뒤 알려드리겠습니다.



[개발 파트]


땡땡씨, 전해주신 파일 내용에서 개발툴상에서는 이 위치값이 전부 틀어져 보이던데 수정 부탁드려요.


무무씨, 그거 XX년 XX월에 XXXX프로젝트의 개발 사항을 그대로 이어서 하는 거라 그때 다른 작업자분이 작업했던 위치값이 아마 툴상에서는 틀어져 보일 텐데 모바일에서는 또 제대로 출력값이 나오는 이슈가 있었어요. 저도 디자이너라 개발 원리는 정확히 모르지만 출력값은 문제가 없어서 그때도 그냥 배포했다고 들었는데 만약 고치게 된다면 무무씨가 완전 처음부터 다 다시 개발해야 할 거라 한 번 확인해 보시고 그래도 수정할 필요가 있다면 추후 제가 수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런 거였습니까? 건들다가 큰일 날 뻔했네요. 관련 내용 전달 감사합니다. 저도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기록과 가이드로 인해 두 번 세 번 일할 내용들이 앞선 단계에서 빠르게 추려지고 정리되자 물론 일일이 나 혼자 이러한 것들을 정리하는 것이 처음에는 소모적이었지만 나와 밀접하게 일하는 몇몇 동료분들은 긍정적인 경험을 하게 되자 하나둘씩 조직 차원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자체 가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서로 빠르게 공유하면서 실무 단계를 맞춰나갔고 나와 같은 급인 분들이 이후 말단에서 미들급으로 중심을 잡게 되자 이후 우리의 작업 방식이 다음 입사자분들에게는 그것이 기준이 되어 자연스럽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자 본래 기업에서 아마 이렇게 되길 원했으리라 추측되는 실무자가 주체성 있는 프로젝트의 위력은 굉장히 강력한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사랑하는 나의 동료들에게.


매번 필요 정보도 기재되어 있지 않고 일치하지 않은 잘못된 정보로 가득했던 텅텅이 문서 자료들이 점점 명확한 내용과 관련 정보들로 채워져 서로서로에게 공유되니 우리는 동료를 더 믿고 의지하며 혹여 생각지도 못한 힘든 상황이 발생해도 웃으며 일할 수 있었다.


- 동료 평가 내용 중 일부 발췌 -


항상 우리 회사는 NO 답이라고 생각했던 처음의 나는 이제 저 멀리 사라졌다. 물론 골칫덩어리 문제들은 여전히 지금도 계속 생기지만 이들과 작은 보폭이라도 우리가 같이 맞춘다면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지금도 나와 함께해 준 나의 동료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며, 앞으로도 이들과 함께 가능한 한 더 많은 일들을 같이 해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하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회사를 다니며 힘들었던 부분을 중점적으로 풀었는데 어찌 사람 일이 힘든 일만 있으리라.

다음 이야기부터는 회사를 다니면서 즐겁고 기뻤던 소중한 경험들도 풀어내보고자 한다.



*표지 이미지 출처 - Freepik Free License

이전 04화 네? 가이드가 없어요? 히스토리를 몰라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