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 생태계에서 헤엄치는 IT 디자이너의 일기 - 3
이전 글에서 한 번 언급했던 적이 있었을 텐데 이곳에는 사수-부사수 제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이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너무 놀랐던 부분이다. 대개의 회사들은 그래도 '온보딩'이라고 해서 신입이든 경력이든 처음 입사 시 업무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기간과 제도를 마련해두고 있기 때문이다.
일당백 해야 하는 스타트업들은 이곳과 유사하게 그런 제도가 없는 경우도 있고 딱히 없어도 모르는 것이 있거나 한다면 팀 리더나 기존 팀원들에게 물어서 하면 될 일이니 크게 문제 될 일이 없지 않겠냐며 생각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그 차원이 달랐다.
같은 팀원 혹은 선임일지라 하더라도 서로 각각 맡은 프로젝트가 전혀 다르며 심지어 서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아예 모르기 때문에 내가 맡은 업무 또한 관련해서 가이드를 전혀 줄 수 없었고 또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를 케어하는 직무를 담당하겠다는 근로계약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더 놀라웠던 것은 팀 리더조차 나에게 업무를 배당해 주긴 했지만 관련해서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하며 주의해야 할 점은 무엇이며 그런 최소한의 가이드도 제공하지 않았다. 나는 정말 사막 한가운데 혼자 떨어져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방랑자 느낌이었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다시피 리더와 선임분들께 도움을 요청해도 돌아오는 문장은 단 한마디였다.
그냥 담당 프로젝트에 배정된 기획자와 개발자에게 알아서 묻고 하시면 돼요.
그 당시를 회고하는 입장에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신입이자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 혼자 알아서 하라는 그 한마디가 너무 외로웠고 또 슬펐다. 다른 사람들은 크루즈 배든 통통배든 하다못해 나무판자를 타든 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그동안 그 누구도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도와달라고 외쳤음에도 무시하고 지나쳐 가버리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나 혼자 알아서 하라 했다고 진짜 내 마음대로 했다가 일을 더 크게 망쳐서 회사에 손해를 끼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두려움마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아무런 정보나 가이드 없이 이미 숙련자들인 기획자, 개발자분들과 맞닥뜨리게 되자 당연하지만 정말 볼품없이 깨져버리고 말았다.
특히나 내 끊임없는 (그들 입장에서는 시간 소모적인) 질문과 미숙한 일 처리에 타 직무 관련자들이 답답해하는 게 눈에 너무 보였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나는 눈치 보며 움츠러들기까지 했다. 그런 상황이 지속되다 보니 나중에는 팀 리더와 조직장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
왜 가이드 하나 알려 주지 않는 거야! 적어도 주의할 점이라도 알려줄 순 있잖아!
이건 오히려 일도 두 번 하게 되고 조직 모두에게 도움 되지 않는 거 같은데!
그러다 나중에 어느 정도 업무가 손에 익으니 깨닫게 된 것은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도 개입하지 않는 만큼 프로젝트를 거의 온전히 혼자 다 스스로 컨트롤하기 때문에 소속 조직이 따로 있어도 리더와 조직장의 눈치를 보면서 업무를 하는 것이 아닌 실무자의 독립 주체성이 굉장히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프로젝트의 방향성 등의 큰 그림은 리더와 조직장의 컨펌이 필수이지만 그것도 초기에만 그렇고 그 이후에 진행 과정은 각각의 디자이너의 판단에게 전적으로 맡겼다. 그리고 중간보고 등에서 잘못 설정된 부분 정도만 상급 직급자들이 수정해 주는 정도였고 혹은 디자이너가 정 판단이 안 설 때 어떤 방향으로 가면 될지 조언을 구하는 이른바 상급자들이 멘토와 같은 역할이었다.
그것은 신입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는 현상이었기 때문에 같은 팀 내 선임이라 할지라도 다른 실무자의 작업 환경에 입을 대는 것은 오히려 상대방의 권한을 침범하는 것이라 말을 아꼈던 것이다. 또 사람마다 혹은 프로젝트마다 필요한 작업 프로세스가 각기 다 다르기 때문에 같은 프로젝트에 배정된 사람들끼리 논의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기에 입사 초반 나에게 자신들이 아닌 같은 프로젝트 사람들에게 그냥 직접적으로 물어보라고 오히려 조언해 준 격에 가까웠다.
언뜻 냉정해 보일 수 있었던 것이었지만 돌이켜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네가 신입 햇병아리이니 잘 못 해낼 거 같으니까 우리가 컨트롤해줄게'가 아닌 적어도 이 회사에 채용된 만큼 스스로 프로젝트를 책임질 수 있는 역량이 있는 자일 거라 신뢰하기 때문에 '부딪히고 깨지더라도 스스로 헤엄쳐봐라'의 메시지였다. 처음에는 우왕좌왕 많이 하며 더디게 성장했지만 한 번 일하는 방법을 깨우치자 그 뒤로는 확실히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실력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힘들지만 하나하나 스스로 해내가면서 오히려 더 몸으로 배운 것도 많고 나의 커리어 자산이 확실하게 되는 것은 있었지만 처음 그 과정에서 정신적 소모는 굉장히 컸다. 특히나 나 혼자 고립되고 도와달라고 해도 외면받는 거 같은 느낌에 회사를 출근하기가 너무 싫을 정도였고 한 번은 업무 도중 심장이 너무 뛰어 병원에 갔다가 공황장애 의심이 보인다며 관련 진찰을 권유받기까지 했다.
그러자 이 시스템의 부작용과 문제를 선명하게 인식하게 되었고 이것을 그대로 놔두면 나의 다음 세대 후배들까지 고통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기업과 개개인의 성장도 중요했지만 사람이 아프고 나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렇게 키워놓은 인재가 고통받다 아파서 그만둬버리면 오히려 인적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겪었던 이러한 고충들은 다행히 입사 동기들과 가까이 지내던 동료분들도 동일하게 느꼈던 부분이라 많은 공감은 얻었지만, 워낙 굳어져있던 문화였고 또 스스로 주도적으로 해나갈 수 있는 기회라는 장점도 분명 존재했기에 좋은 부분은 살리면서 단점은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와 뜻이 맞는 동료들은 마음을 모아 천천히 하나씩이라도 바꿔보려고 실천해 보게 되는데 다음에는 이에 대한 우여곡절 스토리를 풀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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