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 생태계에서 헤엄치는 IT 디자이너의 일기 - 2
직무가 디자인이다 보니 작업물 자체가 시각적 결과물이었기 때문에 업무 소통의 오류가 확실히 줄어드는 장점이 있었다. 때문에 특히 외국인 분들과 소통할 때는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시각적 자료를 쓰는 경우가 많았고, 그러다 보니 업무가 미숙하던 신입 때 겪었던 아이러니한 상황을 하나 소개해보고자 한다.
당시 담당 업무는 북미 프로젝트의 일환 중 하나였고 담당 부서 또한 북미 지부와 연결되어 있는 곳이라 협업해야 하는 분들이 북미 쪽 분들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사내에 중간에서 팔로우 업해주시는 한국어가 가능한 기획자분들이 계셨고 그분들은 재미동포분들인 경우가 많았다.
겉으로는 나와 한국인 동료분들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분들은 여태까지 나고 자란 환경 자체가 한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보는 시각과 생각의 관점 자체도 미국인이었을 텐데 '동포'라는 어감 하나로 한국 사람과 협업하는 거처럼 어떻게 보면 착각했었던 거 같다.
그리고 나 또한 미국인은 아니었고 북미 프로젝트라 하더라도 한국 법인이 최종 결정권이 있는 조직 구조이었기에 내가 속한 디자인 총괄 조직에 작업물을 승인받는 것을 최우선시하였다. 보통은 이런 진행 과정이 정석이라 큰 문제가 일어날 일이 없었기에 여기에 특이한 변수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다.
그 한마디의 피드백이 날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1차적으로 팀 내부의 컨펌 승인을 받은 뒤 북미 부서 쪽에 공유한 작업물은 한참의 시간 후 피드백이 날아왔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예상하셨겠지만 바로 이 문단의 제목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보자마자 그때의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네?? 그게 뭔데요??
사실 지금도 썩 이해가 쉽지 않은 피드백이다. 분명 초기 기획과 디자인 콘셉트 회의에서 논의된 레퍼런스 계열로 제작했고 심지어 디자인 총괄인 내가 소속된 디자인 조직에서 최종 컨펌 승인을 내린 것인데 갑자기 북미향 디자인이 아니라면서 수정 피드백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때 당시는 나 또한 사회 경험이 미숙했기 때문에 내가 작업한 디자인 작업물 전체가 다 부정당한 기분이라 무언가 '모욕감'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런 좋지 않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고 우선적으로 팔로우 업 기획자에게 이 피드백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지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드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앞뒤가 안 맞는 어딘가 이상한 설명들이 오고 갔는데 그때는 피드백도 이건 아메리칸 스타일이 아니다 어쩐다 그러고 갑자기 디자인 요소 중 한 부분을 각도를 틀어달라며 그러면 아메리칸 스타일에 가까워진다는 둥 정말 하나부터 열 가지 다 이해하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위 기술한 피드백 상세 세부 내용은 이해를 위해 일부 각색한 내용입니다.)
아니, 같은 이미지인데 똑바로 서 있으면 코뤼아 느낌이고, 각도가 다르면 어뭬리칸이라니??
이것이 아무리 시각적 자료가 있어도 오히려 오해의 여지가 더 크게 키워지는 특이 케이스 중 하나이다.
이 특이하고도 특이한 사건의 진실은 사실 맨 첫 문단에 있다. 간단하자면 간단한 이유인데 그것은 팔로우 업 해주시는 북미 담당 기획자분들이 찐 한국인이 아닌 해외에서 나고 자란 '동포'였다는 것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어가 어눌한 것은 아니나 적절한 단어와 문장을 구사하는 것에는 한국인 정도의 레벨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시발점이었다.
물론 그들이 업무 하는데 문제가 있을 정도로 한국어 레벨이 안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한국인이 외국에서 영어로 업무를 처리한다고 생각한다면 업무를 볼 수 있을 수준 정도의 영어 레벨과 비교하여 여러 복잡한 뉘앙스가 많이 가미되어 있는 피드백과 회의를 해야 하는 수준의 영어 레벨은 일반 비즈니스 언어 실력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어뭬리칸 스타일이 아니다.
이 뜻은 사실 굳이 영어 원어 느낌으로 설명하자면 내 작업물이 잘못 제작되었다는 뜻이 아닌 현지 북미 타깃 유저들 성향이 활동적이고 그에 맞춘 북미 프로젝트의 방향성이 역동성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디자인 세부 요소들에서 정적인 느낌에 치우쳐 있으니 이 부분을 디벨롭시켜 달라는 이야기였다.
그것을 우리의 동포님이 한국어로 통역과 동시에 축약하다 보니..
오우~ 이건 어뭬리칸 스타일이 아니랍니다~
아이콘이나 이미지들을 옆으로 돌려보거나 하면 어뭬리칸 스타일이 될 거 같은데요~?
(이게 역동성을 좀 더 표현해 달라는 의미였던 거 같다..)
이렇게 피드백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경악의 이마 탁..!
당시에는 그저 기획자분이 나를 골탕 먹이려는 줄 알고 오해할 정도로 정말 논리적으로 해당 피드백이 이해되지 않아 각 조직 간 토론을 하다 나중에는 왜 이 납득할 수 없는 피드백을 억지로 반영하여 수정해야 하는지 따져 묻기까지 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그러자 기획자분도 이런 복잡하고 구체적인 설명이나 소통 능력에서 자신의 한계를 느꼈는지 결국 북미 부서의 부장님이 내려와 해 주신 설명을 들은 후에야 모든 것을 이해하여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웃지 못할 에피소드였다.
이 계기로 나는 아무리 디자인 시안이 시각적 자료로써 묘사한 말을 구현해서 보여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일 뿐. 실제적인 소통 언어에서 단어의 쓰임과 문장의 구조, 또 언어의 뉘앙스가 핵심 요점의 간극 차이를 극과 극으로 벌릴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나 또한 스스로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향상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되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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