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 생태계에서 헤엄치는 IT 디자이너의 일기 - 8
*본문의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하여 개인 정보 보호를 위해 일부 각색하였습니다.
지난 6, 7번째 일기장에서 같이 협업했던 다른 나라들에 대한 감상과 인상 깊었던 일화들에 대해 풀어냈었는데 으레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반대로 외국인들이 바라보는 한국과 한국인은 어떨까 하는 궁금증은 한 번쯤 일 것이다. 당시에는 업무 하느라 바빠서 넘겨 버렸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국 아니 더 나아가 한국인인 나와 일을 같이 하면서 어떤 느낌이었을지 지금에서야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그러면서 언젠가 지나가듯이 사내-외 외국인 동료분들이 나에게 몇 가지 이야기 건네주셨던 것이 기억나 이번 이야기에서는 지난 이야기들과 달리 좀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외국계나 해외와 일할 일이 많은 곳에서 자주 벌어질법한 해프닝 일화들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어느 햇살 좋은 날, 삼삼오오 점심을 같이 먹으러 나간 동료분들 중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한국인이었던 나는 처음에는 그 질문에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혀 눈알만 도르륵 굴릴 뿐이었다.
'네프네프'가 뭐지..?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온 점심 메이트들은 순진무구한 눈빛과 한국인인 나의 대답이 너무 궁금해죽겠다는 표정으로 강한 호기심을 보여 꽤 난감했었다. 그때는 애초에 '네프네프'가 뭔지 모르니 바로 대답을 하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읽고 계신 분들 중 직장인들이라면 상당수가 아마 눈치채셨을 법한데 '네프네프'는 한국 직장인들의 필수 소통어인 '넵'이었다.
요새야 급여체라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해 번역기에서도 넵, 네넵, 넹 등 '네'의 변형어들이 곧장 'Yes', 'Yep' 등으로 잘 변환돼서 나오지만 약 10년 전만 하더라도 그 정도까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해 메신저 텍스트 소통 시 번역기가 한국인의 '넵'을 'Nepp', 'Nene' 등 이런 식으로 출력해 버리는 바람에 외국인 입장에서는 모든 한국인들이 뭔 말을 하면 꼭 '네프네프', '네네치킨'을 말하는 걸로 밖에 안 보였던 것이다.
네네치킨은 정말 상상도 못 한 포인트였다.
처음 듣자마자 길거리에서 얼마나 박장대소를 했는지, 하하.
메신저는 짧은 시간 안에 다수가 여러 문장을 쏟아 내는 곳이기도 해 상대편 나라에서 작성된 문장 중 이상하게 번역된 부분이 있어도 한국인인 우리도 대강 무시하고 제대로 번역되는 업무 본론만 집중하는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에 사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그 '네프네프' 정체에 대해 궁금해할 줄은 몰랐었다.
이번에도 번역과 관련하여 한자 문화권 나라 출신 분들과 있었던 짤막한 일화 중 하나이다. 한국도 한자 문화권 나라 중 하나이지만 다른 나라들과 큰 차이가 있다면 가까운 일본조차 그들의 글자인 히라가나, 가타카나와 함께 한자를 여전히 혼용하여 사용 중인데 우리는 한자어를 써도 '한글'이라는 표기 언어를 쓴다는 점에서 완전히 달랐다.
평상시에는 그 차이점을 그렇게 뚜렷하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그때의 그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날은 새롭게 시작하는 프로젝트로 같이 일하게 된 'O나'씨*라며 소개글을 읽게 되자 나는 평소대로 메신저에 한글로 'O나씨~ O나씨~'하면서 이름을 불렀다.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끝이름만 공개)
그리고 프로젝트 회의를 위해 해외에 있던 'O나'씨가 한국의 우리 회사에 방문하여 실제로 만나 뵙게 되자 그분은 아주 수줍게 이 문단의 제목과 같은 말을 나에게 건넸던 것이다.
*초록색 - 필자
땡땡씨.. 저 알몸으로 다니는 사람 아니에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땡땡씨가 제 이름 부르실 때마다 '나체씨~ 벗고 다니는 알몸씨~'라고 해서 저희 쪽에서 유명했었어요^^
..... 네?????
내가 협력사 사람을 벗고 다니는 노출증 환자로 만든 셈인가..(폭풍 당황)
어떻게 된 일인가 하니.. 한국도 한자 문화권이지만 우리에게는 앞서 말한 '한글'이 있어 한자어를 사용할 때도 한글로 쓰이기 때문에 사람 이름 또한 각 글자마다 한자뜻(훈)을 가지고 있어도 소리(음)만 반영하여 한글로 적힌다.
예) 이하영
여름 하(夏) | 영화/꽃 영(榮)
그리고 번역기 또한 사람 이름은 한글로 쓰인 표면적 발음만 뽑아서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도 비교적 쉽게 사람 이름을 구분하여 문장 구성을 한다.
물론 특이 케이스도 있긴 하다..
그러나 다른 한자 문화권 나라의 경우 그들의 언어에서는 자신의 이름 뜻이 그대로 '한자'를 통해 보이는 우리와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그래서 한글로 적은 '나'라는 글자가 상대방 이름에 담긴 예쁜 뜻의 '나'로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없었던 번역기는 그 나라 언어에서 아마도 가장 많이 쓰이는(?) 한자로 추정되는 '벗을 나(裸)'로 적힌 해프닝이었다.
그리고 옛날 어른처럼 한문으로 쓰인 신문이나 글귀를 많이 접한 세대들이면 모를까 한문에 대해 거의 까막눈이었던 나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라(그게 이름인지 구분도 안되었다.) 그 한자를 보았어도 별 대수롭지 않게 '나체씨~ 벌거벗은 알몸씨~'라고 그분을 계속 불렀던 것이다.
단순히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는 거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상대방을 다른 사람들도 다 있는 공식 석상에서(업무 메신저도 엄연히 공적 공간이니..) 자칫 민망할 수 있는 이름으로 계속 지명하여 불렀으니 이것은 꽤나 실례가 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그분도 내가 외국인이라는 것과 한국에서는 한자를 잘 사용하지 않아 젊은 세대들은 잘 모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셔 감안하여 웃고 넘어갔던 일화이지만 당시에는 내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햇병아리 시절이라 정말 등줄기에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렸던 웃픈 기억이다.
이 경험 이후로 사람 이름은 번역기가 훼손(?) 하지 못하도록 무조건 '영문 표기'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미묘한 관계가 계속 있어왔던 나라들과 사업 진행 및 업무 교류를 하다 보면 솔직히 정치 상황을 피하긴 정말 힘들다. 뉴스에 나올 정도로 심한 국가 간 갈등 상황이 벌어지면 우리는 하던 업무를 계속할 수 밖에는 없지만 그때마다 협업하는 해당 나라 분들과는 숨 막히는 눈치게임이 시작된다.
평소에도 실례가 될 수 있는 단어나 말조심을 하는 편이지만 이때는 더더욱 말수를 일부러 아낀다거나 극도로 정제된 문장을 사용하려고 신경을 평소보다 더 쓴다. 그리고 그런 경직되어 있는 사내 분위기를 풀어주고 싶었던 것인지 일본인 동료 한 분이 어느 날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건네왔다.
여러분들 모두 친미파, 친중파 그리고 친일파니까!
제휴 회사나 다른 협력자분들도 이해해 주실 거고 다들 다 잘 해내실 거예요^^
정말 그 순간 다들 뇌정지와 함께 사무실 안에는 잠시의 침묵이 싸늘하게 지나갔다.
싸늘하다.. 가슴에 '매국노'라는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일본인 동료분은 정말 악의로 한 말은 아니었다. 일본 현지에서도 한국을 좋아하는 이들을 보고 '친한파'라고 부르는 언어적 표현도 있는 만큼 그분은 정말 '친할 친(親)'이라는 뜻에서 우리 직원 모두가 해외 다른 나라와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친근감 있는 사람들이니 다 잘될 것이라고 이야기해 준 것이다.
그러나 그 순수했던 의도와 달리 우리 반도국가 한국은 예로부터 주변의 수많은 강대국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면서 여러 외세의 개입으로 힘들었던 역사가 많았기에 사실 원래라면 좋은 의미의 '친땡땡'이 한국인이 듣기에는 매국노의 스멜을 강렬히 풍긴다는 것을 차마 인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눈물)
다행히 그분은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의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포함해 상황적 이해 안에서 자신이 쓴 언어가 적절치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이후에는 다행히 두 번 다시 해당 단어들은 쓰지는 않으셨다. (특히 마지막 단어는 한국인이 듣기에는 차마..)
평상시 친한파라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을 좋아하고 마음씨가 상냥하신 분이었기에 충분히 나쁜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인 직원들도 알고 있어서 이 사건은 웃고 넘기는 해프닝으로 지나갔다. 오히려 한국인인 우리가 거기에 한술 더 떠 이런 우스갯소리나 농담을 더하기도 했다.
그래도 고루고루 강대국들 다 언급해 주셨네요.
사대주의 지렸다.
친북파 아닌 게 어디예요. 체포될 뻔했네요.
그리고 급기야 우리 사업은 외화를 벌어오고 있으니 우리 모두 사실 '애국자'라며 한바탕 웃음과 함께 그때의 그 소동은 그렇게 지나갔다.
이렇게 글로 정리하다 보니 새삼 여러 일들이 있었구나 싶은 감상이 젖어 나왔다. 그만큼 이 회사에서 몸담고 지내면서 지나간 세월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쌓였다는 것이니 말이다. 나의 일기장이 이제 거의 끝에 다다른 감이 드는데 다음 이야기에서는 직장인이라면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연봉과 복지에 관련하여 자세한 내용은 보안으로 못 말하겠지만 그래도 그에 대한 내가 느낀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을 한번 늘어놓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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