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 생태계에서 헤엄치는 IT 디자이너의 일기 - 9
첫 일기장부터 재직 중인 회사가 일반 한국 회사와는 조금 독특한 다른 생태계를 가지고 있고 그로 인해 완전히 한국 회사라 부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외국계라고 부르기도 어려워 자의적으로 '다국적 기업'이라고 부르겠다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꿈, 자아실현, 성취감 등 여러 척도가 있지만 직장 생활 이야기에서는 역시 연봉이나 복지 등은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다국적 기업은 다른 한국 회사와 외국계 회사와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연봉이나 복지에 관련되어 회사 보안상 자세한 수치나 세부 내용들은 밝히지는 못하지만 그간 겪어보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개인 감상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이번 일기장의 제목인 '그래서 연봉은 만족하시나요?'라는 질문에 나는 이 문단의 제목처럼 답할 수 있겠다.
'저는 그래도 하는 일이 적성에 맞아요.', '동료들이 저를 인정해 줘요'와 같은 여러 다른 이유를 완전히 배제한 채 순수 금액적으로만 따지자면 솔직히 본인의 계약연봉에 만족하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싶다. 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으니 말이다.
그간 써내려 온 이 일기장의 이야기들을 읽어보신 분들이라면 그래도 재직 중인 회사가 다국적 기업이라 하고 사내에도 외국인 직원분들도 여럿 있을 정도면 필자 또한 구X, 아마X과 같은 기업처럼 많이 받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다.
아쉽게도 나는 신입 시절부터 이 회사를 다니긴 했지만 공채 출신은 아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높은 금액의 연봉 테이블로 책정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내가 머무는 곳은 한국이고, 한국에 기반을 둔 회사인 만큼 '공채 출신'의 위신은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럼 연봉 테이블부터 다르게 책정되면 비공채 직원들은 공채 직원들보다 돈을 항상 적게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인데 과연 실제로 그럴까? 이것 또한 '네니오'다. 정확히는 이제부터 '사람 바이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채 출신이 아닌 분들이 중요 직책을 맡거나 성과를 더 내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테이블 시작점이 다른 것은 맞지만 입사 후의 연봉 인상률도 무조건 공채/비공채로 갈리어 정해진 테이블 안에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 필요한 것은 바로 '실력'이다.
실력과 성과가 좋다면 연봉 인상률이 사람마다 정말 천차만별로 벌어진다. 극단적 예를 들자면 3~5% 인상과 18~19% 인상 등 이런 식으로까지 각자의 인상률 차이가 심하게 나기도 한다.(*실제 수치가 아니니 오해 금물)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초기 계약 연봉이 높았어도 본인이 잘 해내질 못하면 다음 연도에는 자신보다 적은 연봉을 받던 사람에게 얼마든지 추월당할 수 있는 구조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 있어 현재 높은 연봉의 사람도 안주할 수 없었고 또는 낮은 연봉의 사람도 동기 부여나 열정이 꺾일 것 없이 모두가 적극적인 자세로 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는 확실한 실력성과주의 측면을 보여주어 한국 회사이지만 실리콘밸리에서 볼법한 외국 회사들과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실력과 성과가 중요한 것은 맞지만 사실 어느 정도 유연하게 필요한 것은 내 인사 평가를 담당하는 상사들과의 밀당(?)이었다. 인상률과 보상 책정은 조직장 재량이기 때문에 그분들과 썸타듯 신뢰도 쌓으면서 꽁냥꽁냥하지 않으면 연봉이나 다른 보상 체계에서 더 높게 받을 수 있는 것도 덜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말은 무조건적인 아부와 사내 정치질을 하라는 말은 아니다.
상사들도 엄연한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호의적으로 대하는 사람에게 아무래도 더 마음의 문을 쉽게 열 수 있고 그로 인해 예쁜 놈 떡 하나 더 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일은 엉망으로 하고 팀이나 동료들한테 갖은 피해는 다 주면서 상사 옆에서 알랑방귀만 뀐다면 그것은 천하의 역적일 뿐이니 조심하자.
그런 연봉 말고 '복지'에 대해서는 어떤 감상을 느꼈는가.
앞선 3, 4번째 일기장에서 업무나 독특한 조직 환경으로 인해 굉장히 힘겨웠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 이 문단의 제목인 '워라밸'과는 어딘가 맞지 않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 처음에는 무조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지만 (신입 때라 더 그렇게 초조했을 수도 있다.) 이곳을 길게 다니면 다닐수록 못 보았던 장점들도 많이 보였다. 여러 장점들이 있었지만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묶어보니 '존중'이라는 키워드가 도출되더라.
그리고 그중 하나가 이곳은 생각보다 직원들이 가정과 건강을 중시하는 것에 존중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여러 다른 기업들도 자율 근무제나 리프레시 휴가와 함께 임직원 가족을 위한 사내 어린이집과 패밀리 데이 등등 여러 복지를 직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중요하게 보는 것은 그런 복지가 있다는 것보다 그 복지를 정말 거리낌 없이 누리고 사용할 수 있는 분위기인가라는 데에 초점이 있다. 회사의 전체적 방침이 있어도 조직마다 또는 리더마다의 재량을 여지 두는 경우가 많다 보니 어떤 직원은 회사 복지를 잘 활용하며 안락하게 다니는 반면, 어떤 직원은 오히려 눈치 보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통 워라밸이라 함은 '저녁 있는 삶', '야근하지 않는 것' 등등을 꼽는데 전부터 자주 이야기했지만 사실 이곳이 야근이 전혀 없는 그런 회사는 아니다. 앞서 말한 실력성과주의도 있고 해외 다른 나라와 일해야 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오히려 더 치열하게 일해야 할 때도 있어 업무 강도가 낮다고 볼 수 없다.
내가 말하는 '워라밸'은 일하다가 아파서 병원을 다녀오는 것에도 눈치 볼 일도 없고 운동하고 싶으면 운동하고 잠깐 낮잠 자고 싶으면 자러 가도 되고(*물론 자리비움 알림은 필수), 특히 프로젝트 일정상 혹은 긴급 대응과 같은 일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할당량과 업무 진행에만 차질 없게 한다면 일부러 억지 부려 그 이상의 야근이나 업무를 시키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52시간제가 생긴 후로는 야근한다고 무조건 수당비가 나오는 환경이 아닌 것도 한 몫한 거 같다.
이렇게만 해도 스스로 욕심나서 더 일하고 싶을 때는 자기 계발과 커리어를 챙길 때도 있고, 반대로 바짝 일할 때는 바짝 일하고 가정과 건강을 챙겨야 할 때는 직원들은 언제든 자율적으로 시간을 활용할 수 있다. 그리고 휴직이나 지원금 같은 제도적으로도 회사 차원에서 많이 도와주기에 정말 일과 삶의 균형을 돌볼 수 있다는 것에서 이것이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워라밸'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임감이 동반된 상태에서 업무 환경 자유도가 높다는 것은 굳이 비교하자면 구X과 같은 비슷한 제도를 가지고 있다.
게임에서는 고인물하면 그 게임을 오래 해서 시스템을 잘 알기도 하고 캐릭터의 스펙이 매우 좋고 유저의 플레이 또한 매우 능숙한 이른바 '능력자'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보통 회사 평판을 말할 때의 고인물은 그와 좀 반대로 흔히 자신이 해당 조직에 오래 있었음을 이용하여 텃세나 배척을 하는 등의 부정적으로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물론 게임에서도 뉴비들을 골탕 먹이면서 재미를 느끼는 고인물도 있긴 하다.)
이곳도 전혀 그런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업종 계열이 몸값을 올리기 위해 이직이 잦은 IT계열이라 그런지 타 업계에 비해서는 그 수가 적은 느낌이긴 하다. 그럼에도 위 문단에서 언급한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어 근속연수가 긴 직원분들도 어느 정도 꽤 있다.
그리고 여기서는 실력성과주의로 인해 고인물이라고 해서 나태해질 수도 없고, 또 성과주의라 해서 같은 조직 타 직원에게 텃세나 압력을 넣을 수도 없는 개개인마다 별개 프로젝트 투입이라는 환경도 갖춰져 있어 적어도 오래 근속하신 분들을 향해 고인물이라며 부정적 시선을 보내는 것은 상대적으로 적은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회사와 긴 시간 함께 해준 장기근속 직원들을 존중해 주는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다는 것이다.
보통 3-5년 근속을 넘기면 '안식휴가'를 주거나 10년 근속을 넘어가면 감사패와 함께 소정의 보상을 주는 그런 제도들은 다른 회사들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곳 같은 경우는 약간 알게 모르게 '암살(?)'스타일의 보상 제도도 있는데 관련해서는 보안상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요점은 회사와 오래 함께해 준 이들에게 나름의 마음을 많이 표현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연봉 부분에서도 X마존의 베스팅 스케줄 제도(재직 기간이 길수록 배분받는 스톡옵션의 양이 큰 폭으로 증가)와 비슷하게 이곳은 연봉 상승률에서 성과와 함께 주요하게 책정되는 것이 근속연수도 일정 부분 반영되는 듯했다. 근속연수가 늘어나면 아무래도 커리어 부분에서도 더 많이 성장하여 좋은 성과가 쌓일 확률이 높기도 하고 회사의 장기적 기여도를 인정받을 수도 있어 시간이 갈수록 상승률을 더 크게 인정받는 부분도 간과할 수 없다.
어떻게 보면 신입 때부터 엄청난 성과를 내고 큰 보상을 받아간다는 자체가 판타지 일지도..
우선적으로 장점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을 여러 가지 나열해 봤지만 한 가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좋은 장점을 악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이다. 솔직하게 사람 사는 동네에서 모두가 깨끗하고 투명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맞다. 내가 다니는 이곳도 사람 사는 동네라 어뷰징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조직 곳곳에 있음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과 같이 일을 하는 것이 내 업무까지 차질을 빚게 만들어 힘들어서 정말 싫었고 왜 회사가 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인지 억울한 점도 있었다. 그러나 생각 외로 회사도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방지책 제도를 많이 마련하고 있었다는 것을 몇몇 사례를 보고 난 후에 깨달아 그 뒤로는 어뷰징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어도 심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거나 계속 신경 쓰거나 하지 않았다.
회사는 사실 방치가 아니라 어뷰징 증거를 모아두기 위해 시간을 벌고 있었다..!
주로 긍정적인 면을 위주로 이번 이야기를 꾸려봤지만 다 똑같은 사람 사는 인생이라고 나라고 왜 불만이 없겠는가. 이곳도 수많은 엉망진창 우당탕탕 회사 중 하나일 뿐이고 오랫동안 재직하면서 오히려 강하게 불만을 표현하거나 건의한 적도 있었다.
금전적인 부분도 요새는 경기 침체로 인해 성과가 아무리 좋아도 계약할 때 보면 예상보다 못 미치는 경우도 허다하고 커리어적인 부분도 내 맘처럼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기도 하다. 그렇기에 다른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떠나는 동료분들도 많이 보았고 스스로도 그런 좋은 기회가 온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떠난다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무조건적으로 내가 원하는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환상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만사 모든 일에는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게 되어 있기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하면 할수록 지금보다 더 나은 것을 추구하되 모든 것이 만족되게 갖춰져야 한다는 집착은 하지 말아야 함을 피부로 느낀다.
등가교환의 법칙..!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나는 아직까지 이 회사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자의든 아니든 어쩌다 보니 여기서 근 10년의 세월이 흘렀고 미래는 한 치 앞도 모를 일이라 얼마 후 다른 곳에서 새 출발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소중한 내 청춘 중 일부를 보낸 곳이라 그간의 일들을 한 번 정리하고 싶어 이렇게 9번째 일기장까지 도달했다.
다음 이야기에서는 마지막 소회를 남기며 과거형 일기가 아닌 미래에 대해 한번 주저리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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