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열매에 관하여
저는 시골의 작은 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시절 선생님들은 참 무서웠지요.
쉬는 시간 왁자지껄하던 아이들도
교실 문이 열리는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으니까요.
'사랑의 매'라 적힌 굵은 몽둥이는
엉덩이에 자주 닿는 손님이었습니다.
어느 날, 몇몇이 복도에서 뛰다가
하필이면 제일 무서운 선생님께 딱 걸렸습니다.
엎드려뻗쳐 엉덩이를 맞고는
학교 뒷산으로 끌려갔어요.
삽을 하나씩 쥐여주며
“구덩이를 파라.” 하십니다.
‘설마 여기에 우리를 묻는 건 아니겠지?’
두려움에 목이 바싹 말랐지만
아무도 묻지 못했습니다.
허리만큼 구덩이가 깊어지자,
이번에는 운동장 한쪽으로 데려갑니다.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두터운 비닐을 들추자
역한 냄새가 훅 끼쳐왔습니다.
겨우내 삭힌 똥거름 한 동이씩 퍼 담아
다시 산을 오릅니다.
판 구덩이에 거름을 붓는 일을 반복합니다.
온몸이 땀과 똥 냄새에 젖을 즈음,
거름 가득한 구덩이 위에 적당히 흙을 두른 후
선생님은 작은 호박 모종을 심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판 건 무덤이 아니라
호박 자리였습니다.
그해 호박은
우리가 실어 나른 거름 덕에
유난히도 잘 자랐습니다.
나무는 뿌리에 의존해 열매를 맺습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자식에게 먹이를 나르는 어미새와 같습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뿌리라면 자식은 열매입니다.
나무가 뿌리의 힘으로 결실하듯
아이들은 부모의 영향으로 삶을 형성합니다.
열매를 보면 뿌리를 알 수 있습니다.
나무껍질이나 입에 아무리 많은 영양을 공급한다 해도
뿌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나무는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뿌리는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지만
언제나 땅속에서 움직입니다.
좋은 뿌리는 조용히 물을 끌어올리고
어리석은 뿌리는 독을 빨아들입니다.
부모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 결은 고스란히 자식의 삶 속에 스며듭니다.
뿌리가 열매를 속일 수 없습니다.
잠시 눈을 피한다 하여도 아무것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보이지 않는 고리로 이어진 순환입니다.
혹시 내 마음속 어두운 흙이 뿌리를 감싸고 있진 않은지,
내가 모르는 사이 물 대신 독을 빨아올리고 있진 않은지.
부모는 가끔 자신을 돌아보고
먼저 맑아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호박이 자라던 그해 여름,
나는 한 가지 배웠습니다.
좋은 열매를 바라거든,
먼저 좋은 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는 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풍성한 영양과 맑음으로
삶을 지탱하는 일이라는 것을요.
우리 아이들이 또 다른 뿌리가 되는 날
이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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