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반대지만 같은 사무실에서 일해요 #6
"오늘 수요일 맞지?"
"응~ 수요일이 너무 더디 오는 것 같아. 지금 튼다?"
남편은 사무실을 오픈한 날부터 그렇게까지 일찍 열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도 9시 반이면 문을 열었다. 출근하자마자 그가 한 일은 ‘부재 중’이라는 팻말을 ‘영업 중’으로 돌려놓고 불을 켜고 환기시킨 뒤 온라인 광고를 업데이트하기. 이후 본격적으로 손님과의 릴레이 상담이 시작된다. 퇴근 시간은 저녁 7시 반. 내가 반일 중개보조원으로 출근하는 3~4일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그가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회사 다닐 때 적어도 주 3~4일은 저녁 약속이 있고 주말이면 골프도 쳐야 했던 그였다. 그런 그가 사무실을 운영하면서는 일 마치고 후 따로 약속에 가는 것도 피곤하다며 퇴근 후 집에 와서 저녁 먹고 쉬는 게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렇게 우리가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을 때 생긴 취미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나는 솔로'라는 프로를 보는 것. 그냥 보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을 만큼 열렬히 감정 이입을 하며 봤다.
"이번 기수는 죄다 괜찮은 편이네?"
"저 사람은 말투를 왜 저렇게 하는 거야?"
"둘이 잘될 거 같다 그렇지?"
"내가 나가면 최소 3표는 받을 텐데"
"뭔 소리야? 오빠가 3 표면 난 몰표야~"
'나는 솔로'를 보면서 우리는 출연자와 그 상황에 과하게 몰입하면서 의견을 내놓곤 했다. 아는 사람이 출연한대도 이렇게까지 열렬히 시청할 수 없을 정도로. 리얼리티와 설정이 혼재된 남의 연애사에 이렇게까지 도파민 뿜뿜 할 일인지 다 보고 나면 종종 현타가 올 지경이었지만, 이 취미 생활을 쉽게 끊을 수는 없었다. 그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 그가 더 열렬했다. 이런 세계가 있었나 막 알게 되어 억울한 사람처럼.
"사실 나 그때 오빠도 이름 들으면 아는 회사 2세랑 소개팅했었다? 영광인 줄 알아!"
"왜? 2세랑 결혼하지 그랬어? 나는 그때 변호사가 나 좋다고 했었다? 강남에 자가 있는"
"근데 왜 나랑 결혼했어? 응? 말해봐"
2세 소개팅 얘기는 가끔 나오는 내 레퍼토리였지만 능력 있는 변호사 소개팅 얘기는 처음이었다. '나는 솔로'효과인 건가? 남편의 연애사, 취향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왜 나랑 결혼했냐고 묻는 말에 그는 답하지 않았다.
남편 나이 31세, 내 나이 27세 우리는 소개팅으로 만났고 만난 지 8~10개월쯤 결혼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때 이상하리만큼 소개가 물밀듯 들어왔다. 그런 시기였던 것 같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문자 T에 목적형인 남편은 그의 스타일대로 거침없이 돌진했고 결혼 후에는 거침없이 일에 몰두했다. 그를 옆에서 보면 매일이 도전의 연속이라 생각 들었다. 나도 덩달아 열심히 일했다. 아이 낳고 키우면서 빡센 대기업에 다녔던 그때 나의 유일한 돌파구는 작은 내 차를 끌고 강남으로 출퇴근하던 길 107.7 라디오를 들었던 한 시간. 그 시간이 있어 회사 퇴근 후 육아 출근했던 그 시절을 견뎠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는 서로의 시시콜콜한 연애사나 이성에 관한 취향 같은 이야기를 나눌 일이 드물었다. 대문자 F에 공상가인 나는 이야기해 주고 싶었는데 남편은 관심이 없었달까. 그런 우리가 결혼한 지 19년 차가 되면서 비로소 서로에 대해 알아 갔다. '나는 솔로'라는 프로를 열렬히 보면서 말이다. 그래서였다. 그 프로 보는 날을 유독 기다렸던 건.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가 응원했던 커플이 성사된 날이었을까? 그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도 나는 저녁 먹은 걸 치우고 있었고 남편은 분리수거 꾸러미를 들고나가는 길이었다.
"난 능력 있는 변호사보다… 당신이 그 사람인 것 같았거든. 남은 생을 함께해도 좋을 것 같은 사람. 음... 이유는 잘 모르겠고 설명도 잘 안되는데, 그냥 네가 그 사람이다 싶었어"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더니 부끄럽다는 듯 후다닥 남편이 나갔다. 현관문 근처에서 중얼거리면 설거지하느라 물을 틀어놓은 아내가 못 들었겠지 생각하면서 나갔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설거지할 때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곤 했으니까. 그날만큼은 예외였지만.
하지만 나는 그날도 들었다는 내색 없이 설거지를 할 뿐이었다. 그게 우리 부부의 표현 방식이니까. 투박해도 정 깊은, 우리만의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