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들은 없고 혼자 집안 정리를 할 때 우리 집 텔레비전은 보통 켜져 있다. 백색 소음처럼 켜놓는 게 익숙해졌달까? 반려견 푸들 짜장이가 혼자 있을 때 심심해할까 봐 만화 채널을 틀어놓고 나가는 것도 우리 집에선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백색 소음으로 텔레비전을 켜놓을 때 종종 등장하는 채널이 있는데 바로 홈쇼핑 채널이다. 마치 이 시간이 지나면 못 살 제품을 판매하는 것처럼 절박하게 설명하는 쇼호스트들의 에너지는 전통 시장 상인들이 대면으로 뿜어내는 에너지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의 에너지가 있다. 또 세상 친절하게 굴었다가 으름장을 놓았다가 하는 원맨쇼를 보는 재미는 덤.
그날도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무의식 중에 텔레비전을 켰을 때였다. 한 홈쇼핑 채널에서 리모컨이 멈추었다. 어떤 채널이 오늘은 그렇게 호들갑인가 봤더니 H 채널이다. 새해맞이 다이슨 헤어드라이어(일명 에어랩) 세일을 하고 있다. 금액을 자세히 보지 않았지만 세일 가격이 얼마 정도 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몇 개월, 아니 2~3년 전부터 하나 사야지 벼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홈쇼핑 채널에서 다이슨이 나올 때면 생각했다. 남편이 월급을 받았을 때, 그때 다이슨을 사야 했는데...
남편이 회사 다니며 월급을 가져다줄 때는 여윳돈이라는 게 이렇게까지 중요한지 솔직히 몰랐다. 쪼들린다 싶을 때면 한 2주만 버티면 통장에 월급이 찍히곤 했으니까. 다음 달 25일이면 생활비가 어김없이 입금이 되었으니까. 그런데 자영업을 하는 지금은 달랐다. 계약이 터질 때는 주르르인데 한번 조용하다 싶으면 그 조용함이 오래가는 게 이 업종이었다. 게다가 오늘 계약이 성사된다고 하더라도 3개월 뒤에나 보수가 들어오는 일이기에 우리 집 생활비 통장에는 늘 3~4개월치의 생활비가 들어있어야 비로소 굴러갔다.
나 또한 돈을 벌지 않는 것이 아니었지만 둘 다 고정 수입이 아닌 상태에서 다이슨을 산다는 건 마음처럼 선뜻 되지 않았다. 그래서 못 샀다. 남들은 다 있는 것 같은 다이슨을. 이제 내 머리도 긴 머리에 접어들었는데. 전에는 단발이라 그렇게까지 필요하지 않았다면 이제는 이야기가 다른데. 기업 미팅 가거나 강의할 때, 내가 주최하는 모임 때 빛나 보이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초라해 보이지는 말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나에게 다이슨이 필요한데.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상황이 짜증스럽다거나 구질구질하냐면 그렇지는 않다. 그와 나의 나이 사십 대 중반. 아이는 큰돈 들어갈 입시를 앞두고 있고, 2년 전 열쇠를 받은 서울 우리 집에 다달이 대출 이자가 나가기에 우리는 돈이 없는 거니까. 둘 다 수입이 없어서라든지, 사치를 해서 생긴 빚으로 쪼들리는 건 아니니까.
글을 쓰다 보니 알았다. 내가 그동안 다이슨을 못 산 진짜 이유를. 그를 사랑해서다. 질러놓고 생활비 부족할까 봐,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질까 봐. 그러면 낮에 일하느라 애쓰고 돌아온 그에게 건네는 말이 쏘아버린 새총알처럼 빠르고 날카롭게 그에게 날아갈까 봐. 500만 원도 아닌 59만 원짜리 다이슨을 지난 생일에도 못 샀고 올해 생일에도 못 샀고 이번 새해에도 결국 나는 사지 못했던 것이다.
이번 세일 때는 꼭 다이슨을 사네 마네, 이번 명절에는 해외여행을 가네 마네 지지고 볶으며 사는 지금이, 훗날 돌이켜 봤을 때 ‘행복한 그때’라는 걸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당시에는 몰라서 놓친 많은 감정들이 바로 행복이었다는 것을 시간이라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한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듯이.
다이슨을 아무렇지 않게 살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못 살 정도는 아닌 지금이 멀리서만 찾았던 '행복'이라는 것을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이 시간을 나는 오랜만에 영화 보자고 밖에서 만난 남편이 내 손을 잡아 입에 가져다 대고 호호 불어주면서 ‘춥지?’해준 어느 따스했던 겨울밤으로 기억할 것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나는 여태 다이슨을 사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사고 나면 이런 추억과는 영영 이별일 테니까. 나는 다이슨을 가진 여자가 될 것이고 그러면 그를 사랑해서 다이슨을 못 산 여자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내 일상에 다이슨쯤 없으면 어떠랴. 그보다 따수운 사랑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