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조금 전 참치 카나페를 주문할 때만큼이나 평온한 어조였다.
덕분의 미야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 농담이 아닐까 하는 생각부터 혹시 자신이 남자와 여자라는 단어를 반대로 알고 있었나 하는 혼란까지 생겨났다.
다급하게 번역기를 켜 ‘남자’를 검색해보았지만 알고있는 대로였다.
그렇다면, 정말로?
“일단 여기 카나페. 더 먹고 싶은 거 있니?”
접시를 내려놓은 마마는 하루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다시 진열대 너머로 사라졌다. 그동안 미야는 줄곧 그녀, 아니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혼란만 더해질 뿐이었다. 대체 저 사람이 어딜 봐서 남자라는 거야?
“이해해요. 나도 처음 들었을 때는 무지 신기했으니까.”
“어, 음…”
미야의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였다. 묻고싶은 게 많았지만 불행히도 그녀의 한국어 실력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하지만 치마를, 그, 남자를 좋아하…나요?”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크로스 드레서라고, 동성애자랑은 좀 다른 건가 봐요. 다른 건 몰라도 마마는 확실히 여자를 좋아해요. 예쁜 언니들 이야기를 그렇게 한다니까?”
에…
눈으로 들어오는 것과 실제 정보 사이에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칵테일을 건넨 마마가 미소를 지어보였을 때는 눈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일본의 유명한 방송인 중에서도 여장남자는 있었다. 그러나 중성적인 이미지인데다 몸짓이나 행동으로 남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역시 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앞으로는 자주 여행을 다니면서 보고 들어야지. 지금까지 내 세계는 너무 좁았어.
“달리가 늦네.”
미야가 그렇게 다짐하고 있을 때 마마가 말했다. 그런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열리고 누군가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 생겨났다.
"아이고, 이제 오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검은 코트를 입은, 키가 큰 남자였다. 마마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바쁘신 분 잡아다 일 시키는 제가 더 죄송하죠. 출근 시간을 좀 더 늦췄어야 했는데."
"별 말씀을. 그리고 좀 늦는다고 어제도 말씀드렸는데."
“30분을 조금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우리는 사회적으로 약속을 했잖니. 근로계약서에 네가 한 싸인 아직 잉크도 안 말랐거든?”
대답하는 대신 남자는 겉옷을 벗어들고 마마의 옆으로 왔다. 흰 셔츠에 검은 나비넥타이 차림인 것으로 보아 웨이터, 혹은 바텐더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하루에게 인사를 한 남자가 미야를 보았을 때였다. 줄곧 무심하던 그의 얼굴에 놀라움이 내비쳤다. 미야도 마찬가지였다.
“엥, 유이?”
◇ ◆ ◇
손님은 점점 늘어났다. 어느새 테이블은 절반 넘게 채워졌고 바 자리에도 드문드문 사람들이 앉았다.
대화 소리가 커지자 마마는 스피커 볼륨을 조금 높였다. 느릿하게 편곡된 [Autumn Leaves] 가 사람들 목소리 사이로 녹아들었다.
“아니, 솔직히 저녁 정도는 같이 먹자고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그게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할 일인가?”
그리고 하루는 취했다.
“네 말대로 공과 사가 확실한 사람인 모양이지. 괜한 오해를 살까 봐 걱정도 됐을테고.”
“그래도 사람이 고마우면 그럴 수도 있지. 좀 더 좋게 말할 수도 있었잖아요!”
“그건 그렇긴 하지만…”
이성이 알코올에 씻겨 내려가고 나자 남은 건 서운하다는 감정 뿐. 나름 상황을 이해해보려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거절 자체보다는 너무 단칼에 거부당했다는 점에 상처를 받은 모양이었다.
“그건 그렇고 하루 네가 먼저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고? 그 말은…”
마마가 턱을 괴며 빙그레 웃었다.
“잘생겼구나. 그렇지?”
하루의 눈이 가늘어졌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이,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아니기는? 진짜 착하고 좋은 선배인데 얼굴이 취향이 아니라서 도저히 안되겠다고 했던 게 누구더라?”
움찔.
아마도 3년 쯤 전일까, 애써 무의식 저편으로 던져두었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왔다.
정곡을 찔린 하루의 눈이 빠르게 깜빡여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벼, 별꼴이네? 제가 어디 얼굴만 보고 반하는 그런 사람이에요?”
“아니었니?”
“맞죠. 아니 맞기는 한데…”
대충 우겨볼까도 생각했지만 상대가 영 좋지 않다. 이쪽 흑역사는 물론 연애사까지 죄다 꿰고있는 마마였다. 이대로 계속 부정했다가는 얼굴조차 까먹고 살았던 구남친들과의 다채로운 에피소드가 튀어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반박불가. 애꿏은 빨대만 잘근잘근 씹던 하루는 카나페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멀어서 손이 닿지 않았다.
그때 미야가 접시를 이쪽으로 밀어주었다.
“아, 고마워요. 아리가또.”
미야는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자신도 카나페를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다시 앞에 서 있는 남자, 정확히는 그의 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칵테일을 만드는 과정은 꽤나 간단했다. 얼음을 채운 셰이커에 술을 비롯한 각종 재료들을 넣어 강하게 흔들고 나면 완성이었다.
이번에 그녀가 주문한 건 다이키리. 셰이커 뚜껑이 열리자 레몬 빛깔 액체가 라임이 꽂힌 마티니 글라스 안으로 부어졌다.
“주문하신 다이키리 나왔습니다.”
미야는 고개를 숙이고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시트러스 특유의 강한 신맛이 입 안 가득 퍼지고, 이어 설탕의 풍미가 혀끝을 간질였다. 삼킨 뒤에도 상큼한 여운이 오래도록 입술에 맴돌았다.
“맛있어요!”
“달리야, 여기 피냐 콜라다 한 잔 더.”
남자는 말이 많지 않았다. 거듭되는 미야의 칭찬에도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조금 숙여보였을 뿐이었다.
주문을 받을 때라고 다르지 않아 마마에게 한 차례 눈길을 준 뒤 곧바로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한쪽 귀에 달린 피어싱 여러 개가 뒤따라 흔들렸다.
이름이 달리라고 했던가.
지하철역에서 만났을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그때는 무뚝뚝하지만 착한 대학생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업무에 집중하는 프로 직장인 같다. 앳된 얼굴은 미야의 또래처럼 보이지만 표정이 없어 가늠하기 어려웠다.
“피냐 콜라다 나왔습니다.”
하루의 앞에 잔을 놓고 오면서도 달리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꽤 당황하고 있었다. 거나하게 취한 듯한 그녀의 모습 때문에.
이미 피냐 콜라다를 세 잔째 들이키고 있지만 럼은 거의 들어가지 않았다. 성분으로만 따지면 파인애플 주스 수준이었다. 첫 잔부터 마마가 최대한 적게 넣으라고 눈치를 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취객의 그것. 얼굴 전체가 새빨개지다 못해 눈까지 충혈되어있어 누가 보면 위스키나 보드카라도 원샷했나 싶을 정도였다.
최연소 단골이라더니 콜라나 무알콜 맥주만 마셨나보다. 아니면 그동안 너무 많이 마셔서 벌써 간이 작살났나? 고작 저걸로 저렇게까지 취할 수가 있다고?
“あのー。”
(저기…)
하지만 진짜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달리의 눈이 유이, 아니 미야를 보았다.
블루 하와이까지는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름이 예쁘다고 러스티 네일을 시키더니 지금은 다이키리를 홀짝이고 있다. 하나같이 소주는 따위로 만들어 버릴만큼 엄청난 도수를 자랑하는 칵테일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미 취한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지나치게 흐트러짐이 없는데다 말투도 또렷했다.
뭐 이렇게 중간이 없어?
“그, 음, 이전 지하철에서는…”
“日本語でもいいですよ。”
(일본어로 말하셔도 괜찮아요.)
달리의 말에 미야의 눈이 조금 커졌다. 곧 그녀의 입에서 조금 전과 다른 빠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先日は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먼젓번에는 감사했어요.)
“いいですよ、そんなくらい。”
(그 정도로 뭘.)
아니에요, 라고 말하며 미야가 고개를 저었다.
“助けてくれなかったらたくさん苦しめられたです。 その人、韓国語で言っても聞いてないから···”
(구해주시지 않았다면 한참 시달렸을 거에요. 그 사람, 한국어로 말해도 듣지 않아서…)
“新村や弘大の周辺を回る時は気をつ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 チンピラみたいなやつも多いから。”
(신촌이나 홍대 주변을 돌아다닐 때는 조심해야 해요. 양아치들이 많으니까.)
미야는 조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들어도 매끄러운 일본어였다. 조금 전 그가 한국어로 말하는 걸 듣지 않았다면 분명 일본인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나저나 난감한 일이었다. 신촌이라면 앞으로도 매일같이 가야하는 곳인데...
“そんなやつ、たった一言で十分です。 これからもうるさくしたらこうやって睨みながら-”
(그런 놈, 딱 한 마디면 충분해요. 앞으로도 귀찮게 굴면 이렇게 노려보면서-)
그때 갑자기 달리가 눈을 부릅뜨고 미야를 보았다.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야 이 씨X새X야."
순간 정적.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적어도 미야는 그렇게 느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거친 한국어에 입이 쩍 벌어지는 걸로도 모자라 손에 든 유리잔을 놓칠 뻔 했다.
シバル, 일본에도 잘 알려진 한국어 욕이었다. 몇년 전 어떤 한국 드라마에 나오면서 유행하게 되었다. 묶다(縛る)와 비슷한 어감과 상반되는 강렬한 뜻 때문인지 미야의 친구들을 비롯해 여러 사람이 사용하곤 했다.
하지만 본토의 시바루는 그 임팩트부터가 남달랐다. 발음도 좀 다른데다 날카로운 인상의 달리가 말하니 더 그랬다. 놀랍다 못해 위협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대사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쓰는 말인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뒷부분은 무슨 뜻이지? 스에키? セッキ?
미야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사이 달리는 표정을 풀고 씩 웃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뒤로 빼며 웃었다.
"라고 질러버리면-“
쿵!
"나한테 맞지. 그렇지."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마마가 머리를 붙잡아 누르지 않았다면.
“손님들 계신데서. 그것도 손님한테 예의없게. 응?"
“아 좀, 아! 놔 봐요! 자기 몸 하나는 스스로 지킬 수 있어야 하잖아요!”
“넌 네 몸도 못 지키잖니. 키만 멀대같이 커 가지고. 그리고 맞을 짓 해놓고 변명은?”
마마의 말과 다르게 달리는 꽤 단단한 체형의 소유자였다. 등과 어깨는 떡 벌어진데다 걷어붙인 팔뚝 위로 핏줄이 선명했다. 그런 그가 마마의 가느다란 팔에 눌려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다음에 또 그러면 혼난다, 마마는 그렇게 말하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진열대 뒤편으로 사라졌다.
“...무서운 사람이야, 진짜.”
그제서야 겨우 몸을 일으킨 달리는 몸 여기저기를 툭툭 털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더 할 말이 남았다는 듯 미야에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착한 애인 것 같네. 다행이야.”
하루의 앞으로 돌아온 마마가 두 사람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미야와 달리는 무어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킥킥대고 있었다.
“다 들려요. 다 알아듣기도 하고.”
“알아. 그리고 칭찬이니까 괜찮아. 외국인이라길래 놀랐었는데 괜히 걱정했네.”
“좋은 사람이에요. 좀 특이하기는 하지만.”
두 사람의 시선은 어느새 미야에게 향해 있었다. 하지만 달리와 이야기하느라 이쪽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때 마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하루야?”
“네?”
하루가 뒤늦게 돌아보자 마마는 곤란하다는 듯 턱을 긁적이다 말했다.
“진짜,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
“뭔데요?”
“사실 네가 왔을 때부터 이걸 말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계속 고민 중이었단다. 굳이 알 필요가 있나 싶어서.”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고민하시는 걸까, 하루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그리고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민진이가 찾아왔었어.”
◇ ◆ ◇
“재미있었어요?”
“네!”
“다행이다. 그 알바생, 새로 온 사람이라 저도 잘 모르거든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미야를 보며 하루는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순전히 마마에게 미야를 소개시켜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가 이렇게 좋아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미야가 말했다.
“좋은 분이었어요. 말도 잘 하고.”
“그런 것 같았어요. 둘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했던 거에요? 즐거워 보이던데.”
“음, 이전의 일에 대해서요.”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했었지.
들을수록 신기한 인연이었다. 아직 한국에 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는데 알게 된 사람이 있다는 것도, 그 사람이랑 이렇게 우연히 다시 마주쳤다는 것도, 심지어 그 장소가 마마의 가게였다는 점마저.
잠깐, 그때랑 똑같네.
기시감이 밀려와 하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곧 그녀의 걸음이 멈췄다.
“잠깐 담배 좀 피워도 될까요?”
미야는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 가까이 같이 살면서 그녀가 흡연자일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냄새를 맡기는커녕 라이터를 본 일조차 없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하루는 두 달 가까이 이어오던 금연의 역사를 끊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방에서 꺼낸 담배는 포장이 뜯어져 있었다. 사실 언제 샀는지도 가물가물했다. 불을 붙이고 숨을 들이쉬자 참으로 오랜만에 맛보는 텁텁한 연기가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하아.”
한숨섞인 담배 연기가 까만 밤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퍼져가는 연기를 보고있자 마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민진이가 찾아왔었어.’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었다. 이제 다 잊었다고,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름을 듣는 순간 모든 것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에 대한 기억들도, 그리고 감정도.
김 부장조차 무너뜨리지 못했던 금연의 탑이 맥없이 허물어졌다. 의외로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정말로 금연을 할 생각이었다면 두 달 내내 가방에 담배를 넣어다니지도 않았으리라.
그때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루야.”
거짓말처럼, 꽤나 갑작스럽게.
“오랜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