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고리를 돌리려 했을 때 문 너머에서 피아노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루는 잠시 행동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부드럽게 깔리는 피아노 반주 위로 나른한 보컬이 얹어졌다. 오래된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듯 잔잔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하루는 입모양만으로 가사를 따라부르고 있었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멜로디였다. 어디서 들었더라…
찰칵.
문을 열자 거실에 앉아있는 미야가 보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휴대폰 쪽으로 손을 뻗자 하루가 손을 내저었다.
“괜찮아요.”
구두를 벗으면서도, 화장실로 가 손을 씻으면서도 입술은 연신 흥얼흥얼. 살짝 찌푸린 미간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다.
그런 채 테이블 앞에 앉은 그녀는 느닷없이 박수를 짝, 하고 쳤다. 그리고 미야에게 말했다.
“*****, 맞죠?”
“네?”
예상 밖의 단어가 튀어나와 미야는 그렇게 되물었다. 하루가 다시 또박또박 말하자 이번에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Everything Happens To Me.
“아, 맞아요.”
“그렇죠? 쳇 베이커?”
“알고 있어요?”
미야가 놀라워하며 물었다. 영화 ost로 리메이크되어 유명세를 탄 노래이기는 했지만 그녀가 듣고있던 건 오래된 원곡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원곡의 가수가 누구인지까지 맞혔던 것이다.
하루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당연히 알죠. 좋아하거든요. 재즈.”
대학교 때부터 학교 근처의 재즈바에 자주 들락거리던 그녀였다. 딱히 재즈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음료 한 잔만 주문하면 하루종일도 앉아있을 수 있었고, 때마침 손님도 별로 없어 과제를 하기 좋았기 때문에.
멋드러진 인테리어나 라이브 공연 없이 레코드판만 주구장창 틀어주는 가게였지만 하루는 그곳을 좋아했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때 알음알음 알게 된 재즈 지식들은 지금까지도 나름 유용하게 써먹는 중이었다. 아는 척 하거나 있어보이고 싶을 때 이만한 게 없었다.
그때가 좋았지, 하루가 막 추억에 젖어들려 했을 때였다. 미야가 문득 물었다.
“그러고보니 저녁밥은 먹었어요?”
멈칫.
하루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버렸다. 대꾸하는 그녀의 입에서 쓴웃음이 반, 한숨이 반 섞여 내뱉어졌다.
“아니요. 바쁘다고 하더라고요. 엄청.”
저녁이 바쁘다고…?
제대로 들은 것 같았지만 해석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미야는 아까 한국어 학당에서 배웠던 관용적인 표현을 떠올렸다.
일본어도 그렇지만 한국어에는 저런 독특한 표현이 많다고 들었다. 완전히 뜻을 살려 번역하기 힘든만큼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잊어버리기 전에 단어장에 적어두어야지. 조금 있다 어떤 상황에서 쓰는 표현인지 물어봐야겠다.
미야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채 하루는 방으로 걸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머릿속에는 박 대표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사양해야겠습니다. 일이 많이 밀려서 오늘은 좀 힘들 것 같군요.’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정중한 거절이었으리라. 아쉽다는 듯한 목소리와 표정이 특히 그랬다.
하지만 하루는 알고 있다. 처리할 일이야 산더미지만 다음 주에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들이고, 김 부장과의 미팅이 그의 이번 주 마지막 스케줄이었다는 걸.
비서인 하루가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박 대표가 모를 리도 없다.
즉 이건 명백한 거절의 표현이다. 대충 이런 뜻이다.
저리 가.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너랑은 밥 안 먹어.
“아 진짜!!”
흑역사가 탄생할 때 가장 크게 고생하는 건 언제나 이불이었다. 연신 이불을 걷어차던 하루는 급기야 곁에 있던 펭귄 인형을 끌어안고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펭귄의 얼굴이 찌그러질 때마다 그녀의 후회도 같이 깊어져갔다.
생각이 짧았다. 사실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다. 대표와 비서가 금요일 저녁에, 그것도 회사 밖에서 마주보고 앉아 초밥을 먹을 일이 왜 있냐는 말이다.
직원들이 보기라도 한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심지어 회사 코앞에서.
공사 구분이 철저한 박 대표가 그런 상황을 용납할 리가 없다. 하지만 고마워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는데!
아, 다른 사람한테 생각없이 말하지 말라고 했던가.
‘김 부장 퇴치’로 훈훈하게 끝날 수 있었던 하루가 단단히 꼬여버렸다. 설상가상 내일부터 주말, 실수를 만회할 기회는 월요일이나 되어야 돌아온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는다. 굳이 끄집어내는 게 바보같은 짓이리라.
“저기…”
하루가 두 번째로 몸을 비틀고 있을 때였다. 문 밖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미야가 말했다.
“혹시 저녁밥을 먹지 않았다면 만들어놓은 음식이 있어요.”
“정말요?”
[아직 남았는데 드시겠어요?]
이번에는 미야 대신 번역기가 물었다. 하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잔뜩 헝클어진 머리가 뒤따라 흔들렸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메뉴가 뭐에요?”
“오늘 학교의 선생님이 알려주셨어요. 이름은…”
메모를 뒤적거리던 미야가 외쳤다.
“자프채!”
“아…”
하루의 얼굴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미안. 그건 사양할게요.”
“싫어해요?”
“네.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요.”
잡채라면 이제 질색이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평생 입에도 대지 않을 작정이었다.
점심도 부실하게 먹었는데 이상하게 저녁 생각이 없었다. 김 부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술이 생각난다.
맥주보다는 소주, 소주보다는 피냐 콜라다…
오? 잠깐만.
“저, 미야.”
“네?”
미야가 돌아보았을 때 하루는 침대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빗고 있었다. 겉옷을 챙겨든 그녀가 물었다.
“혹시 칵테일 좋아해요?”
◇ ◆ ◇
한 시간 뒤, 이태원역 3번 출구.
“하아-”
출구로 나온 미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밤공기를 들이마시자 이제야 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에 탔을 때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은 자의로 걸음을 디딘 적이 거의 없었다. 바글바글한 인파에 묻혀 이리저리 쓸려다닐 뿐이었다. 불금을 맞이한 6호선에는 평소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열기가 가득했다.
“미야, 괜찮아요?”
“어렵네요.”
“어렵기는. 이럴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거에요.”
한국에 온 이후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건 처음이었다. 신촌이나 홍대, 망원의 밤도 꽤나 정신없는 편이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보며 미야는 신주쿠에 처음 가보았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출입구가 200개나 되는 그곳과 비교하기는 어려웠지만 인구 밀도만큼은 비슷한 것 같았다.
“이쪽이에요.”
하루는 형형색색의 간판 사이로 그녀를 이끌었다. 미야의 눈이 빠르게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태원에 대해서는 켄타에게 들어본 적이 있었다. 분명 한국에서 외국인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 말을 증명하듯 거리의 사람들은 태반이 외국인이었다. 번쩍이는 네온사인에는 대부분 한국어와 영어가 나란히 쓰여 있었다. 종종 읽을 수 없는 문자가 쓰여져 있기도 했다.
처음 겪어보는 이태원의 분위기를 즐길 틈도 없이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길을 걷다 마주친 외국인들 중 몇몇이 두 사람을 향해 휘파람을 불거나 박수를 쳤다. 저들끼리 무어라 이야기하며 낄낄대기도 했다.
처음에는 기분 탓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따. 분명 두 사람을 향한 제스쳐였다.
“무시해요. 관종들이니까.”
하루는 이런 식의 캣 콜링에 익숙한 모양이었다. 어쩔 줄 몰라하는 미야와 달리 미간을 조금 찌푸렸을 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골목을 몇 번 꺾어 들어가자 주위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침침한 길로 들어서자 모퉁이에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계단 앞에 놓인 입간판이 밝게 빛났다. 기묘하게 생긴 사자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 옆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BAR : 줄무늬 사자」
미야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하루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름, 특이하죠? 사실 나도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몰라요. 생각 날 때마다 물어보는데 항상 다른 대답이 돌아오더라고요.”
그녀가 자주 오는 가게인 모양이었다. 돌이켜보면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 미야와 달리 그녀는 종종 술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같이 쓰는 냉장고에 늘 맥주캔이 서너 개씩 들어있던 걸 보면.
“원하는 거 마셔요. 오늘은 내가 살 테니까.”
딸랑-
가게는 2층이었다. 들어서자마자 어둑한 조명과 느릿한 재즈 피아노 소리가 두 사람을 반겨주었다.
긴 바 테이블 너머에는 양주가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스툴에 걸터앉자 진열대 뒤에서 누군가 걸어나왔다.
“하루 왔니?”
“마마.”
어림잡아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그녀의 눈이 미야에게로 향하자 하루가 말했다.
“자취 메이트에요. 전에 이야기했던.”
두 사람의 눈이 미야에게로 옮겨졌다. 잠시 우물쭈물하던 미야가 곧 입을 열었다.
“미야자키 하루임니다. 미야, 라고 해주세요.”
“ママでいいです。 はるもそう呼ぶから。”
(마마라고 불러줘요. 하루도 그러니까.)
유창한 일본어에 하루와 미야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하루가 물었다.
“마마, 일본어 할 줄 아셨어요?”
“간단한 인사말 정도는. 알다시피 이쪽은 워낙 외국인 손님이 많거든.”
마마는 그렇게 말하며 미야를 향해 웃어보였다.
“ごゆっくり休んでください。”
(푹 쉬다가요.)
미야의 눈이 반짝였다.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피부는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데다 한쪽으로 모아 넘긴 어두운 머리칼에서는 윤기가 흘렀다.
키는 어지간한 남자들만큼이나 컸지만 몸집은 작고 여렸다.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와 길게 뻗은 쇄골이 가느다랬다. 입가에 맺힌 주름조차 원숙미라는 이름 아래 우아함을 더해주었다.
고상하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걸까.
“하루는 늘 마시던 거일테고, 친구는?”
나긋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물을 때까지 미야는 마마에게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제서야 뒤늦게 메뉴판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ブルハワイお願いします。”
(블루 하와이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블루 하와이 한 잔. 하루야, 카나페도 먹을래?”
“네. 참치로요.”
“알겠습니다 손님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마마는 그렇게 말하고 진열대 뒤로 사라졌다.
하루가 미야에게 속삭였다.
“예쁘죠? 마마.”
“네.”
미야의 목소리는 여전히 몽롱했다. 대답하는 도중에도 마마가 사라진 진열대를 보고 있었다.
하루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신기해요. 어떻게 저렇게 관리하는지 모르겠다니까요. 피부좋고, 군살 하나 없고.”
“정말로 그래요.”
“가끔 보면 여자인 나보다도 더 여성스럽다니까?”
“정말…”
미야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하루 쪽으로 돌리는 그녀는 방금 들은 말을 곱씹는 눈치였다.
잘못 들은 걸까?
“에?”
“맞다. 미리 말을 못했네요.”
“어떤 걸…?”
“마마, 남자에요. 그것도 40줄 언저리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