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걸음을 내딛은 건 하루 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각, 신촌.
미야는 빠른 걸음으로 Y대 한국어 학당 건물을 나섰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났을 뿐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피곤이 가득했다.
코트 소매를 걷으며 미야는 학교에서 받은 종이들을 펼쳐보았다. 얼마 전 치뤘던 반편성시험의 성적표와 안내장이었다.
LEVEL 1. 가장 기초부터 가르쳐주는 클래스.
예상했던 바였다. 정식으로 한국어를 배운 적이 없는데다 반편성시험까지 망쳤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이사 다음 날 치뤄졌던 반편성시험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실감하게 해주었다. 말하기 시험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쓰기는 처참하다 못해 심각했다. 질문을 이해하지도 못한 문제가 절반 이상이었다.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해야지, 그런 마음을 안고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했지만 곧 또 다른 문제가 눈에 들어왔다. 영어권 나라에서 온 학생들이 많아서인지 반 내에서 영어가 암묵적인 공용어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영어로 말을 걸어오는 그들에게 더듬거리며 대답했지만 알아듣는 기색은 없었다. 손짓과 몸짓, 번역기까지 동원하고 나서야 겨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고교시절부터 영어에는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와세이 에이고(역주: 일본에서만 쓰이는 영어 표현, 재플리시)가 많이 섞인 것도 있었지만 역시 발음의 문제인 것 같았다.
교문을 나서면서 미야는 우선 영어 발음부터 뜯어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어야 수업을 따라가면 되지만 영어는 그렇지 못했다.
이대로 있다간 친구 한 명 사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같은 클래스에 일본인은 그녀 혼자뿐이었으므로 더더욱.
굴다리를 지나자 도로를 따라 나무들이 늘어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앙상한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꽃눈들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3월이었건만 바람은 여전히 매서웠다. 피어오르는 입김을 보며 미야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어느 것 하나 그녀가 알던 신학기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4월에 학기가 시작되는 일본과 달리 한국은 3월부터 학교에 갔다. 봄방학이나 3학기가 따로 없는 대신 기나긴 겨울방학이 있다고 들었다.
그러다보니 겨울방학의 끝은 곧 봄 학기의 시작을 의미했지만 날씨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3월이 끝나갈 때까지도 눈이 쏟아지는 일이 빈번해 정말 봄이 온 게 맞는지 의심하는 일도 자주 있다고 했다.
‘本当だって。 今度一度一緒に行ってみよう。’
(진짜라니까? 다음에 한 번 같이 가보자.)
벚꽃이 흩날리는 등굣길을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그녀에게는 꽤 충격적인 일이었다. 켄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직접 검색해보기 전까지는 믿지 못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녀를 보며 켄타는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라고 말하며 웃었다.
미야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간 그의 입꼬리를 보자 어쩐지 안심이 되었기 때문에.
…….
지하철역으로 들어선 미야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으며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간은 이제 2시 반, 일본어학원에 가기까지는 아직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망원역에 도착해 간단히 점심을 먹고 수업에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미야는 빠른 걸음으로 통로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애써 상념을 흐리게 만들고 나자 곧 다른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저기, 혹시 한국 사람 아니에요?’
‘아니, 저는…’
‘한국 사람이 왜 한국어 학당에 왔어요?’
‘그게 그러니까…’
화장을 한국식으로 해서 그런걸까, 아니면 패션 취향 때문일까, 미야는 평소 한국인으로 오해받는 일이 잦았다.
일본에서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국에 온 뒤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입국심사대 직원부터 고시원 아주머니까지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식당이나 가게 점원은 물론 심지어 한국어 학당의 선생님마저 고민하는 기색이었으니 슬슬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저기.”
한국 사람들조차 헷갈리는 판이니 외국인들뿐인 한국어 학당에서는 오죽했을까, 오리엔테이션이 끝날 때까지 질문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번호 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 딱 지금처럼.
“에?”
아니지, 이건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미야는 고개를 들었다. 코앞에 처음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あの…아니, 그, 지금 뭐라고-”
“아, 혹시 외국 사람이에요? 일본?”
어눌한 발음은 여기서도 말썽이다. 하지만 차라리 하지만 차라리 잘 된 걸지도 모른다. 외국인이라는 걸 알았으니 더 이상 말 걸지 않겠지.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전화번호 말해줄 수 있어요?”
“저, 지금은 제가 바쁘기 때문에...”
“아이, 그러지 말고요.”
분명히 그럴 줄 알았는데.
아마도 대학생일 남자는 끈질겼다. 연신 손을 내저었지만 계속 무어라 말을 걸며 따라왔다.
“일본 어디에서 왔어요? 난 또 한국 사람인 줄 알았네.”
갑작스럽게 시작된 작업은 연결통로가 거의 다 끝나갈 때까지도 이어졌다. 계속 말을 걸면 대답해줄 거라 생각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쪽에서 세게 나가지 않으면 끝까지 귀찮게 할 것 같았다. 어쩌면 지하철까지 따라올지도 모를 일이다.
미야의 머릿속이 바빠진 건 그때부터였다.
외국인인 걸 알고도 이러니 영어나 일본어로 화를 내봐야 소용없을 것 같았다. 하려면 한국말로, 그것도 최대한 강하게 말해야 했다.
“그…”
하지만 그녀의 ‘강한 한국말 사전’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만하세요, 미쳤어요 정도가 한계였다.
한국어에는 일본어로 번역조차 하기 힘든 욕이 많다는 건 들어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직접 들어본 적은 거의 없었다. 켄타의 언어습관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건전했다. 특히 미야의 앞에서는 더더욱.
“그만둬요. 필요없어요. 미쳤어요?”
“와, 그 말 이럴 때 쓰는 거 아닌데.”
이럴 때 쓰는 거 맞아. 이 미친 놈아.
”욕할 때는 발음 진짜 좋네요. 누구한테 배운 거에요?”
회심의 일격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미소까지 보였다. 명확한 의사전달을 위해 ‘미쳤어요?’만큼은 일부러 또박또박 말한건데…!
그때였다. 앞을 가로막고 선 남자가 미야의 팔목을 잡는 게 아닌가.
“그만하세요. 이러지 말아요!”
“내가 한국말 가르쳐 줄게요. 잠깐만 시간 좀 내주면 안될까요?”
이 사람이 정말!
“本当にいいんですってば!”
(진짜 괜찮다니까요!)
탁!
아.
뿌리친 그의 손이 벽에 부딪히며 큰 소리가 났다. 남자는 곧 손을 감싸쥐었다. 언뜻 봐도 빨갛게 부어올라 무시할만한 상처는 아닌 것 같았다.
남자는 잠깐 당황하는 기색이었지만 이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곧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엉터리 일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ゆい。”
(유이.)
돌아보자 검은 옷을 입은 남자 한 명이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사람 사이에 끼어든 그가 미야를 내려다보았다.
“ここでなにしてるの? あそこだと言ったんじゃないか。 みんな待っているのに。”
(여기서 뭐하고 있어? 저쪽에서 만나자고 했었잖아. 다들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나타난 남자는 키가 컸다. 미야가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였다.
오랜만에 듣는 유창한 일본어가 반가웠지만 내용은 영 엉뚱했다. 유이는 누구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그러나 물어볼 틈은 없었다. 미야를 등진 남자는 멍하니 선 작업남을 내려다보더니 한국어로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동굴이 생각나는 중저음의 목소리.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위협적인 느낌을 가진 음성이었다. 적어도 작업남에게는 후자인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본 남자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때마침 두 사람의 키 차이는 어림잡아 10센티 이상, 위압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리라.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작업남의 퇴장은 빨랐다. 긴장이 풀린 미야가 한숨을 내쉬자 남자가 다시 이쪽을 보며 입을 열었다.
“大丈夫ですか?”
(괜찮으세요?)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おかげさまで助かりました。”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미야는 문득 의아해졌다. 돌이켜보면 이 사람, 처음부터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していましたか?私が日本人でことお。”
(알아보셨네요? 제가 일본인이라는 걸.)
조금 전의 비명을 듣기라도 한 걸까, 그런데 남자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見れば分かりますよね? そんなこと。”
(보면 알죠? 그런 건.)
사실 그렇긴 했지만 그마저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적어도 한국에서 그걸 한눈에 알아본 건 그가 처음이었다. 미야가 눈을 깜빡이고 있자 남자는 휴대폰을 꺼내들고 말했다.
“私、 行きますよ。 約束あがるので。”
(전 가볼게요. 약속이 있어서.)
“あ、 はい。”
(아, 네.)
"気を付けてください。 あんなゴミみたいな奴らがいるから。”
(조심하세요. 은근히 저런 쓰레기들이 있으니까.)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本当に。”
(감사합니다. 정말로.)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백화점 쪽으로 사라져갔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목덜미를 덮은 긴 검갈색 머리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미야는 잠시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 개찰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누군가 남자를 불러세웠다.
“ダリ。”
(달리.)
기다리고 있던 친구였다. 백화점 입구에서 기다리겠다더니 그 사이를 못 참고 여기까지 온 모양이다.
"来たか? 俺が行こうと思ったけど。"
(왔어? 내가 가려고 했는데.)
하여간 성격 급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어딘가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따라가자 조금 전 도와준 여자가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게 보였다.
“誰?”
(누구야?)
“しらない。 ただ、 困っていた人。”
(몰라. 그냥 곤란한 상황에 처했던 사람.)
달리가 물었다.
“何処の人だと思う?”
(어느 나라 사람 같아?)
“顔はよく見なかったけど…”
(얼굴은 잘 못 봤는데…)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멀어져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韓国じゃね?”
(한국 사람 아니야?)
그런데 달리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덧붙였다.
“日本人らしく見えないけど。”
(일본인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달리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대체 어딜 봐서?
“누가 봐도 일본 사람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