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역에 도착한 뒤에도 미야는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여전히 손끝이 차갑고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그러잖아도 오리엔테이션과 켄타에 대한 생각으로 잔뜩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작업남의 등장으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마음 같아서는 집으로 가 쉬고 싶었다.
이대로 하루가 끝났더라면 좋았으련만.
“今日の高級文学の授業を担当する宮崎春と申します。 どうぞ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오늘 고급 문학 수업을 맡은 미야자키 하루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왜 이렇게 긴장되는 일이 많은 걸까.
본래 오늘은 선생님들 앞에서 시범 수업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두어 번 정도 그렇게 테스트를 받은 뒤에야 비로소 수업을 배정받을 수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학원에 도착한 미야를 기다리고 있던 건 당장 수업에 들어가야 한다는 소식이었다. 선생님 한 명이 출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가벼운 사고라 크게 다친 곳은 없다고 했지만 수업까지는 겨우 30분 정도 남아있었다. 이미 출석해 교실에 앉아있는 학생들도 있었다.
고민하던 원장 선생님은 미야에게 대신 수업에 들어가달라고 요청했다. 유학 준비반 수업이라 한국어 설명은 필요하지 않고, 교재를 읽고 적혀있는대로 수업을 진행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분필을 집은 손가락 끝이 떨렸다. 목이 잠겨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등 뒤에는 열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칠판을 보고 있었다.
“私はその人を常に先生と呼んでいた。だからここでもただ先生と書くだけで本名は打ち明けない。”
(나는 그를 항상 선생이라 불렀다. 그러니 여기서도 선생이라고 쓸 뿐, 본명은 밝히지 않겠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던가. 이래 봬도 일본어 경력만 21년에 이르는 베테랑이 아니던가.
손끝의 떨림이 멎어갔다. 목소리가 교실을 채워갔다.
바깥에서와 달리 이 교실의 공용어는 일본어였다. 서툰 한국어를 수줍게 말하던 미야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유창하게 책을 읽어내려가는 미야자키 하루만 남아있었다.
유학 준비반의 수업방식은 그녀가 참관했던 수업과 조금 달랐다. 한국어와 일본어가 병기된 회화 교재가 아닌 소설책으로 진행되었다. 미야와 학생들이 돌아가며 책을 읽고나면 미야가 작품 속에 나오는 문법이나 표현 등을 정리해주는 식이었다.
“宿は鎌倉でも辺鄙な方角にあった。 玉突きだのアイスクリームだのという。。。”
(내 숙소는 가마쿠라에서도 외진 곳에 있었다. 당구를 치거나 아이스크림을 먹기 위해서는…)
책은 ‘마음’. 나츠메 소세키의 소설로, 고교 교과서에 실릴만큼 유명한 작품이었다. 미야도 배운 적이 있었다. 덕분에 고교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되어 책을 읽어내려갈 수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배우는 입장이었지만 지금은 가르치는 쪽이라는 것. 조금 전까지는 한국어 학당의 학생이었던 자신이 선생님이 되어 서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先生、 あの、 それは間違っていると思いますが。。。”
(선생님. 그거 잘못된 것 같은데요…)
“え?”
(에?)
물론 부족한 점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학생들의 실력은 굉장했다. 괜히 유학 준비반이 아니었다.
수업은 온전히 일본어로 진행되었지만 되묻거나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책을 읽는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고 중간중간 들어오는 질문마저도 유창한 일본어였다. 발음이 살짝 어색하다는 것만 빼면 일본의 학생들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문법에 한해서는 학생들의 실력이 미야보다도 나은 것 같았다. 미야는 당연하다고 여기던, 혹은 생각없이 사용했던 표현들이 알고보니 틀린 문장일 때도 있었다.
어찌저찌 첫 쉬는 시간이 가까워지자 미야는 긴장을 전부 떨쳐낼 수 있었다. 첫 수업이라는 걸 알게 된 학생들이 여러모로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원어민에게 문법을 지적하는 정도이니 병아리 선생님의 자잘한 실수 같은 건 문제도 되지 않았다.
쉬는 시간이 되자 미야는 책을 넘기며 이후 수업을 준비했다. 낯익은 문장들이 눈앞을 지나갔다.
‘마음’은 학생인 ‘나’가 ‘선생님’과 교류하면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이야기였다. 교과서 속의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미야는 이 소설을 유독 좋아했다. 나츠메 소세키 특유의 유려한 문체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이다.
작품에 대한 관심은 곧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본래도 책을 좋아했지만 그때부터는 꽤나 공격적으로 다양한 소설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장르도, 시대적 배경도 가리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며칠쯤 굶은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공부하기 위해 찾던 학교 도서관이 보물창고처럼 느껴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도서관의 책을 절반쯤 먹어치우고 나자 미야는 빈 노트를 펼쳐들었다. 그리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소설가들이 그랬듯이.
“先生?”
(선생님?)
대학에 간 뒤에도 습작은 계속되었다. 종종 문학공모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입상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런 경험들이 쌓이자 그녀의 작품 세계는 점점 더 견고해져갔다.
그러다 어느 날 툭, 하고 사라져버렸다. 켄타와 함께.
“先生、あの、休み時間···。”
(선생님. 저, 쉬는 시간…)
학생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쉬는 시간이 끝나 있었다.
미야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また始めてみましょうか?”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요?)
◇ ◆ ◇
며칠 뒤.
하루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거실이 그녀를 반겨주었다.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뒤 현관 턱에 드러눕자 피곤에 절여진 몸이 젖은 수건처럼 늘어졌다. 장장 16시간에 걸친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몸은 이미 체력을 다한 지 오래였다.
굉장한 업무량이었다. 아홉번째라는 타이틀과 고액의 주급은 괜한 게 아니었다.
게임으로 치면 캐슬 디펜스쯤 될까, 출근 직후부터 퇴근할 때까지 다채로운 업무들이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하나를 끝내기 전에 다른 일이 치고들어오는 건 예사에 세 가지쯤 되는 일을 한꺼번에 처리해야할 때도 있었다.
외부 촬영 일정이라도 있는 날에는 야근 확정. 퇴근 장소는 알 수 없었다. 먼젓번에는 일산, 오늘은 판교였지만 조만간 광교나 동탄까지 가게 될지도 몰랐다.
오늘도 박 대표의 촬영 스케줄에 끌려갔다가 겨우 돌아온 참이었다. 그나마 8시 언저리에 끝났던 먼젓번과 달리 오늘의 카메라는 밤이 깊도록 멈추지 않았다.
미야는 이미 자는 모양이었다. 하루는 멍하니 천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팔이 이리저리 흔들릴 때마다 현관 센서등이 켜졌다 꺼졌다 했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지만 이대로 잠들 수는 없었다. 몸을 일으킨 하루는 내팽개쳤던 핸드백을 주워들고 안으로 들어갔다.
쏴아아-
샤워기에서 뿜어져나온 물이 온몸을 적셨다. 따뜻한 물이 닿자 하루종일 두르고 있던 긴장이 호르르 녹아 사라져갔다.
“아야!”
그때 물이 닿은 발 뒤꿈치에서 아픔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붙여놓았던 밴드가 반쯤 떨어져 덜렁거리고 있었다. 양쪽 전부 그랬다. 허리를 굽혀 밴드를 떼어내자 껍질이 벗겨져 불그스름한 피부가 드러났다.
며칠 전에 질렀던 펌프스 구두 때문이었다. 예쁜 디자인에 반해 홀린 듯이 데리고 왔는데 영 길이 들지 않았다. 거의 2주 가까이, 출근 때마다 신었는데도!
덕분에 요즘 하루의 발 뒤꿈치에는 밴드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마저도 매일 뛰어다니다보니 붙이기가 무섭게 떨어지기도 했다. 이래서야 연고를 바르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
박 대표는 새로 산 구두같은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좀 더 까탈스러울지도 몰랐다. 신을수록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지는 구두와 달리 그에게 타협이란 없었으므로.
티타임은 그의 아침 루틴이었다. 아침 8시 반이면 어김없이 출근해 그날 결재할 서류들을 훑었는데, 그때 반드시 진하게 우려낸 티를 한 잔 마셔야 했다.
그리고 그 티를 준비하는 건 하루의 몫이었다.
티는 포트넘&메이슨의 잉글리시 블랙퍼스트로 고정. 반드시 1/2티스푼만큼만 덜어내 펄펄 끓는 물에 3분간 우려야 했다.
우유나 설탕은 없어도 상관없지만 티팟과 찻잔만큼은 반드시 알맞게 예열되어 있어야 했다. 잔이 조금이라도 식거나 차가 뜨겁지 않으면 주의를 들었다.
상사에게 ‘반드시’가 많다는 건 비서 입장에서는 꽤나 괴로운 일이었다.
차 한 잔 마시는 것조차 이다지도 까다로우니 업무에서는 오죽했을까. 각종 회의 준비와 스케줄 관리는 기본 소양에, 외부 촬영이라도 있는 날에는 소품 및 의상 관리는 물론 편집 방식 조율까지 도맡아 해내야 했다. 게다가 언제든 박 대표 쪽으로 눈과 귀를 열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계속 뛰어다니니 뒤꿈치가 엉망이 될 수밖에.
인수인계를 받으며 보았던 신 팀장의 슬픈 눈빛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보았던 것이다. 자신이 겪었던, 그리고 하루가 앞으로 겪게 될 일들을.
믿을 수 없는 업무강도와 대표의 깐깐함은 하루의 마음 속에도 사직서를 만들어냈다.
먼저 이 자리를 거쳐간 8명이 위대해보일 지경이었다. 내일은 그만둬야지, 진짜 더는 못 하겠다고 말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잠자리에 든 것만 여러 번이었다.
“하루 씨,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되죠?”
“다섯 시부터 한 시간동안 김상현 님과 미팅 예정되어 있으십니다. 5분 전에 도착하셨다고 연락이 와서 카페 쪽으로 안내 부탁드렸습니다.”
하지만 밤과 함께 깊어져가던 퇴사 결심은 언제나 아침이 되면 눈 녹듯 사라졌다. 이유는 심플했다.
“바로 내려가죠. 시간이 딱 맞네요.”
“알겠습니다.”
아직 통장 잔고의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까.
부실한 재무상태는 퇴사욕구에 있어 가장 효과적인 진정제였다. 박 대표의 깐깐함에 화가 치밀다가도 끝없이 0으로 가까워져 가는 잔고를 떠올리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미소가 지어졌다.
이만하면 버틸 만 하다. 일은 일대로 힘들면서 돈마저 적게 주던 전 직장보다는 비교할 수 없이 낫다.
무엇보다 김 부장, 그 변태 아저씨를 더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에 무한한 감사와 여유가 자라났다.
“안녕하셨습니까 부장님.”
“이게 얼마만이야 박 대표, 그동안 잘 지냈나?”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평화로운 금요일 오후, 스타트업 비움의 사내 카페 ‘채움’.
계단을 내려오던 하루의 걸음이 멈추었다. 하마터면 안고있던 태블릿 PC를 떨어뜨릴 뻔 했다. 눈앞의 광경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무능한 상사의 표본, 잡채 속에 있을 때 가장 멋진 남자, 야근은 기본에 회식은 필수인 이 시대의 진정한 산업역군.
잡채, 아니 김 부장이 거기 앉아있는 게 아닌가!
하루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가, 곧 다시 달아올랐다. 초점을 잃고 방황하던 눈동자가 바닥으로 향했다. 애써 태연한 척 해보려 했지만 표정이 자꾸만 일그러졌다.
“하루 씨?”
“네, 네?”
“앉으세요.”
박 대표의 말이 아니었다면 서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으리라.
간신히 자리에 앉고나자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물음표가 한 가득 떠오르기 시작했다.
일정표에 뜬 ‘김상현’이라는 이름을 보고 설마하기는 했다. 당연히 동명이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드문 이름도 아닌데다 김 부장은 미국에 갔다고 들었으니까.
그랬던 사람이 왜 여기 있는걸까. 그 상현이 이 상현이었단 말인가.
왜 하필 이 사람이어야 했을까? 세상에 훌륭한 김상현씨가 얼마나 많은데!
물음표가 느낌표로 변해 터져나가는 와중에도 김상현씨의 얼굴은 평온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태연한 얼굴로 커피향을 음미할 뿐이었다. 이쪽으로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확실히 여기 커피는 물건이로구만. 역시 박 대표는 안목이 있다니까? 인테리어도 그렇고, 아예 장사를 해보는 건 어떻겠나? 먼젓번에도 말했지만 사내카페로 썩히기만 하는 건 역시 아까운데.”
하루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쉴 뻔 했다. 등골이 서늘해지며 닭살이 돋아났다.
애써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다 틀렸다. 모든 것이 소름끼치도록 그대로였다.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배도, 특유의 이죽거리는 표정도. 칭찬인지 욕인지 애매한 저 화법마저.
이 순간 하루는 혐오라는 감정을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표현할 자신이 있었다. 목구멍이 조여오고 끊었던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때 김 부장이 말했다.
“그나저나 부장이라는 호칭은 그만두지 그래. 나도 이제 자네처럼 어엿한 사업체 대표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