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그러니까 몇 시간 전.
신 팀장의 하루는 조금 일찍 시작되었다. 따로 알람을 맞춰놓은 것도 아닌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여유롭게 출근 준비를 마치고 거울을 보는 그의 얼굴 위로 입사 이래 멸종된 줄 알았던 희망이 내비쳤다. 이유는 하나, 오늘이 비서 대리 마지막 날이었기 때문이다.
인사팀장인 그가 느닷없이 박 대표의 비서로 간택되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 비서가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을 때 우연히 옆에 있었기 때문이고, 나머지 하나는 그가 박 대표의 대학 후배였기 때문이었다.
둘 다 그리 설득력있는 이유는 아니었지만 때마침 인사팀은 한가했고, 그의 구글 캘린더는 깨끗했으며, 박 대표는 몸이 세 개라도 부족할만큼 바빴다.
하루아침에 비서가 된 신 팀장, 아니 신 비서는 지옥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 누구보다 빠른 출근과 늦은 퇴근, 보장되지 않는 휴식시간, 거기다 박 대표의 깐깐함까지.
열심히 지켜왔던 워라벨이 와르르 무너졌다. 평일 저녁이 사라진 건 물론 주말에도 부족한 잠을 보충해야 했다.
여자친구와 함께 맛집을 찾아 서울 곳곳을 누비던 신 팀장은 꿈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날이 갈수록 그녀의 눈빛이 차가워져가는 걸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주말을 온전히 쉬지 않고서는 평일을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런 날들이 두 달쯤 넘어가자 상황이 좀 나아졌다. 고정 출연하던 프로그램 두 개가 사라지면서 박 대표의 스케줄에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대표의 여유는 곧 비서의 여유. ‘앞으로는 당분간 정시 퇴근이 가능할 것’이라며 미소짓는 박 대표를 뒤로하며 신 비서는 가장 먼저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기쁜 소식을 한시라도 빨리 공유하고 싶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예전처럼 퇴근하고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하고 싶었다.
‘축하해 오빠. 음, 그런데 많이 생각해봤는데…’
분명히 그랬는데.
…….
어쨌든 그런 생활도 오늘로 끝. 이제 다시 평화로운 인사팀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니,
“이번이 아홉번째군요.”
이토록 솔직하게 대답하는 박 대표가 원망스러울 수밖에.
“그러니까…”
하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여덟 명이나 그만두었단 말씀이세요? 겨우 반 년 사이에?”
“맞습니다. 모두 사표를 냈죠. 아무래도 신 팀장님께 아무 것도 전달받지 못하신 모양이군요.”
박 대표의 눈길을 받은 신 팀장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지옥같던 지난 두 달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회사 앞 분식집은 자정이 넘어가면 떡볶이를 반값에 팔았다. 저녁 무렵 시작된 방송 촬영은 어지간하면 새벽까지 이어졌다. 서울의 아름다운 야경, 그건 신 팀장을 비롯한 수많은 야근러들이 수놓은 은하수였다.
쌓여있는 카드 할부가 아니었다면 신 팀장의 탈주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마 없었으리라. 딱한 사정을 들은 마마가 하루를 소개시켜주어 그나마 다행이지, 여기서 그녀를 놓친다면 또다시 그 생활을 반복해야 한다. 언제 끝난다는 기약조차 없이.
그래서 일부러 아무 말도 안 하고 연봉계약서부터 내밀었던 건데…!
“그게, 이제 막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제가 설명드리죠.”
우리 똑소리나는 대표님 덕분에 다 망했다.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계약서 쓰러 온 사람한테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솔직하게 털어놓을 줄이야.
신 팀장은 애써 박 대표의 시선을 피했다. 조금 전부터 그의 눈은 처음보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 눈을 본 이상 오늘 하루가 무탈하게 지나가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박 대표의 눈이 다시 하루에게로 향했다.
“인정합니다. 그간 업무 강도가 비정상적으로 강했던 건 사실입니다. 근 5개월간 크고 작은 프로젝트가 끊이지 않았거든요.”
“앞으로는 좀 나아질까요?”
“아니요. 당분간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사업이 본격적으로 커지고 있는 중인데다 최근 방송 출연 요청도 많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라서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군요.”
신 팀장의 얼굴이 또다시 창백해졌다. 코앞까지 가까워졌던 인사팀 복귀가 끝도없이 멀어져가는 순간이었다.
망했다. 오늘 왜 이렇게 솔직해?
반면 하루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몸이 두 개면 하나는 연예인 하면 딱일텐데.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의 눈길은 박 대표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사진으로 보던 것 이상이었다.
비현실적으로 작은 얼굴과 대비되는 넓은 어깨,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는 모델의 그것. 흔하다못해 이제는 조금 진부한 흰 셔츠와 검은 슬랙스 조합도 그가 입으니 달라보인다. 얼굴은 잘생기다못해 예뻐보일 지경이다.
이런 비주얼을 가진 아이돌이 있었다면 단번에 팬이 되었으리라. 고등학생 때 이후 끊었던 덕질을 다시 시작하게 될지도 모른다. 앨범을 열 몇 장씩 사지는 못해도 밤샘 스트리밍 정도는 기꺼이 하리라.
하지만…
불행히도 박 대표의 몸은 하나고, 직업은 사업가며, 하루는 입덕이 아니라 그의 비서로 들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여덟 명이 그만둔 자리로.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야하는 걸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자리를 거쳐간 여덟 명의 사표와 신 팀장의 핏기없는 얼굴이 그 노동 강도를 설명하고 있었다.
“저기, 그…”
하루는 펜을 내려놓았다. 거절해야 했다. 지금 이 계약서에 싸인했다가는 일만 주구장창 하게 되리라.
“그렇게 바쁘신 대표님을 제가 잘 보좌할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되네요. 사실 제가 비서 업무는 해본 적이 없어서…”
“상관없습니다. 신 팀장님이 많이 도와주실 테니까요.”
신 팀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박 대표가 그를 돌아보았다.
“신 팀장님도 처음에는 비슷한 상황이셨거든요. 물론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하게 해내셨고요. 그렇죠?”
“…영광입니다.”
박 대표의 눈이 다시 하루에게로 향했다.
“물론 저희도 억지를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사실을 숨기고 싶지는 않군요. 일이 힘들 건 사실이고, 그만한 대우를 해드리고 있다고 자부하니까요.”
하루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그만한 대우를 해드리고 있다’ 라….
자신만만한 그의 태도와 달리 급여란에 적힌 숫자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복지에서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야근수당은 물론 탕비실 컵라면도 제때 챙겨주지 않던 전 회사보다도 적었다.
이 정도 급여라면 여덟이 아니라 백 명이 그만둔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하물며 대표 본인이 인정할 정도로 바쁘다면야.
그때, 계약서를 훑던 하루의 눈이 급여란 앞에서 멈추었다. 조금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만요. 주급?”
“뭐라고 하셨죠?”
하루는 계약서를 집어들어 가까이 가져왔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주급’, 정확히 그렇게 적혀있었다.
하루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걸 본 박 대표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신 팀장에게 눈길을 주던 그가 중얼거렸다.
“설마 그것까지 안 알려주셨을 줄은 몰랐는데.”
박 대표의 손이 계약서로 향했다. 연봉 항목을 조금 지나친 펜 끝이 ‘주급’이라는 글자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건 주급입니다.”
“잠시만요.”
“2주에 한 번. 매달 14일과 28일에 지급되고요.”
“아니, 아니 잠시만, 그러니까…”
“물론 기본급이고 성과급은 별도입니다. 알고 계시죠?”
“그게 대체…!”
하루의 눈빛이 흔들렸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저게 주급이라고? 그럼 월급은 대체 얼마라는…
“제가 사회 생활을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했거든요. 비움을 창업하기 전까지는 줄곧 거기 있었고요. 그래서 주급이 더 익숙합니다. 지급받는 입장에서도 격주에 한 번씩 돈 들어오는 편이 더 일할 맛 나지 않나요? 저는 그렇던데.“
아니요!
입이 벌어졌지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이성과 욕망이 싸우고 있었다. 급여와 함께 기쁨도 걱정도 두 배로 늘어난 탓이었다.
물론 걱정이 조금 더 컸다. 대체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이 돈을 준다는 걸까?
워라밸이나 저녁있는 삶에 대한 환상 같은 건 없었다. 그런 건 첫 회사에서 김 부장을 만났을 때부터 내다버린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 있는 정시 퇴근은 즐겁고 금요일 저녁은 어김없이 설레는 법이다. 포기할 수 없는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 아니던가.
“그게…”
모든 게 명백해졌다. 거절해야 한다. 해서는 안되는 일이다. 야근은 일상에 주말 반납도 예사일 게 분명했다. 일반적인 회사라 해도 그럴텐데 스타트업, 그것도 게임 회사라면 말 다했지 않은가.
하지만…
“나죠. 물론이죠.”
몸이 생각과 다르게 움직였다.
머리를 한 번 더 매만진 하루는 허리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두 손을 다소곳이 모았다. 영업용 미소는 덤. 몇 초도 되지 않는 시간동안 그녀는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비서로 변신했다.
마마의 말이 옳았다. Impossible is nothing.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면 아직 잔고가 충분하고 절실함이 부족한 거였다. 역시 연륜이라는 건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구나.
어어하는 사이 계약서가 완성되었다. 검토를 마친 박 대표가 싸인을 하자 그제서야 신 팀장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았다. 박 대표가 내민 손을 잡으며 하루가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님.”
+)
“너무 솔직하셨던 거 아니에요?”
하루를 돌려보내고 사무실로 올라가는 길. 신 팀장이 물었다. 박 대표가 그를 돌아보았다.
“거짓말로 끌어들이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봐야 의욕만 떨어질 뿐이지.”
“하지만 굉장히 고민하는 얼굴이던데요. 괜찮을까요?”
“괜찮을 거에요. 지금까지 뵈었던 분들 중 첫 인상은 최고니까.”
신 팀장의 걸음이 멈칫했다. 그가 물었다.
“어떤 점에서요?”
“글쎄…”
잠시 뜸을 들이던 박 대표가 활짝 웃었다.
“돈에 목 메는 거?”
신 팀장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는 걸 본 그가 덧붙였다.
“그렇잖아요? 일이 마음에 안 들면 얼마든지 그만둘 수 있지만 돈이 부족하면 그럴 수 없으니까.”
박 대표의 얼굴에 다시 한 번 미소가 지어졌다. 언제나 신 팀장을 불안하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그가 어깨 너머로 신 팀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번에는 조금이나마 오래 가길 바라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