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응.”
“아니, 정말로?”
“뭐 어때요. 남자도 아니고.”
“그게…”
며칠 후, 이태원의 한 칵테일 바.
마마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한 달 만에 찾아온 단골 손님이 꺼낸 말은 하나같이 굉장한 것들 뿐이었다. 그냥저냥 다닐 만 하다던 회사는 1년도 안되어서 때려치고, 뜬금없이 망원으로 이사를 왔으며, 심지어 자취 메이트와는 부동산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게 아닌가.
“나도 이제 나이가 든 걸까?”
“왜요?”
“그냥, 나만 못 따라가는 건가 해서.”
남자 문제가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요즘 애들은 다 이런걸까. 아무리 그래도 일면식도 없던 사람과 5분만에 같이 살 결정을 한다는 게 과연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물음표가 이어지는 동안 눈앞의 뽀시래기는 태연한 얼굴로 두 번째 칵테일을 비웠다. 그리고 발그레진 볼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왜, 마마가 늘 말했잖아요.”
“뭐를?”
“시작하기도 전에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면 아직 통장 잔고가 충분한 건 아닌지 고민해보라고.”
“그야 그렇기는 한데…”
하루가 테이블 위로 픽 쓰러지며 말했다.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앞으로가 문제지. 이제 완전히 백수거든요.”
사표 수리는 일사천리로 끝났다. 3차까지 이어졌던 입사 면접보다도 짧았다.
갑작스러운 룸메이트의 등장으로 월세 부담이 줄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잔고 파먹기. 당장 다음 달부터 수입이 없다고 생각하니 물 밖으로 튕겨져나온 금붕어가 된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적금 하나 더 들어놓을 걸. 조금만 더 참아서 퇴직금이라도 받을 걸!
취직했다며 취업턱을 펑펑 쏘고 다니던 몇 개월 전의 자신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하루가 괴로움에 파닥거리자 마마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건 걱정하지마. 그보다 말은 통하니?”
“네?”
“같이 살기로 한 사람 말이야. 일본 사람이라면서.”
“그게…”
몸을 일으킨 뒤에도 대답은 얼른 나오지 않았다. 대충 둘러대서 넘기고 싶었지만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어제, 그러니까 이삿날.
점심 쯤 시작된 짐 정리는 저녁이 되기도 전에 마무리되었다. 거실로 나온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
여자는 말이 없었다. 눈동자만 굴려 집안 여기저기를 살펴볼 뿐이었다. 이렇다 할 가구 하나 놓여있지 않은 거실은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았다.
미야자키 하루라고 했던가.
이렇게 보니 그냥 세상물정 잘 모르는 평범한 여자애 같다. 외국의 부동산에서 즉석으로 자취메이트를 찾은 대담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저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녀가 한국말을 거의 못 한다는 것.
간단간단한 문장은 알아듣고 대답하지만 그뿐. 조금만 말이 길어지면 곧바로 번역기를 꺼내들었다. 집 주인 분께서 간단한 일본어를 할 줄 아셔서 다행이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계약서에 싸인하는 것조차 힘들었으리라.
하루에게 일본은 먼 나라였다. 여행 한 번 다녀온 게 전부일 뿐 그 흔한 드라마 한 편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일본어는 고등학교 때 선택과목으로 배운 게 끝. 지금은 히라가나조차 가물가물했다.
“캐, 캔유 스피크 잉글리시…?”
그러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런 질문만 나올 수밖에.
미야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며칠 전 학원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하루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사실 쓴웃음에 가까웠다. 만약 그녀가 영어를 유창하게 한다 해도 자신이 그걸 알아들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그럼 그냥 한국말로 할게요. 괜찮아요?”
끄덕.
“세상에, 아무리 같은 여자끼리라도 그렇지 다짜고짜 같이 살자고 하는 게 말이 돼요? 내가 나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하려고 그랬-”
“あの、 もう少し-”
(저기, 조금만-)
“네?”
미야가 아차, 하는 얼굴로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조금만 천천히 말씀해주시겠어요?]
아.
번역기 어플리케이션의 음성 인식 모드가 켜져 있었다. 한숨을 내쉰 하루는 그녀의 휴대폰을 받아들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만약에, 내가, 나쁜 사람이었으면, 어쩔 뻔 했어요?”
휴대폰을 건네받은 미야는 빙그레 웃으며 무어라 적었다. 억양 없는 기계음이 말했다.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루가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자 미야는 휴대폰을 놓고 조그맣게 말했다.
“그냥, 그랬어요.”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네.
하루는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국어는커녕 영어도 못하는데다 사람은 또 덜컥 믿어버리는 이 어린 양이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학생이라고 했죠? 한국어는 얼마나 할 수 있어요?”
“힘들어요.”
미야는 잠시 틈을 두고 말했다.
“아직, 잘 알지 못해요.”
“그럼 이제 공부하려고 온 거에요?”
“まだ…”
(아직…)
미야의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그녀가 내민 휴대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문득 조금 전 보았던 그녀의 짐이 떠올랐다.
용달을 부르네 어쩌네 하던 자신과 달리 미야의 짐은 겨우 여행용 캐리어 하나 뿐이었다. 유학생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단촐했다. 그것도 이 한겨울에.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하루는 묻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하더니 근처에 놓여있던 커다란 비닐봉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래요 뭐. 그런 건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니까.”
비닐봉지 안에는 마트에서 사 온 청소용품들이 있었다. 하루는 미야에게 빗자루를 건네며 말했다.
“일단 청소나 마저 해볼까요?”
◇ ◆ ◇
“통…하죠?”
다시 현재.
“그럴 리가.”
애매한 대답에 마마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역시 못 속이는 건가, 하루가 멋쩍은 듯 웃자 마마가 말했다.
“네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 없거든.”
말도 잘 안 통하는 사람과 한 지붕 아래에서 산다라…
마마의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하고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입을 다물기로 했다. 조언과 잔소리는 종이 한 장 차이. 이미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잔소리가 될 뿐이었다.
“아무튼, 네가 다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이겠지. 잘 지내봐. 언제 한 번 데리고 오고.”
“넹. 물론이죠.”
그렇게 말하며 돌아서려던 마마가 다시 이쪽을 보았다.
“맞다. 그럼 여기 한 번 연락해볼래?”
“이게 뭐에요?”
하루는 마마가 내민 종이를 살펴보았다.
크기로 보아 명함인 것 같았지만 조명이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움직일 때마다 한쪽 귀퉁이의 ‘BEEUM’이라는 글자만 빛을 받아 반짝였다.
마마가 말했다.
“단골이 다니는 회사 대표네 비서가 갑자기 그만두었다고 하더라고. 소개시켜 줄 사람 없냐고 하던 차에 잘 됐네.”
“비서요? 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
“얘는? 달리는 바텐더 해봐서 저기서 저러고 있니?”
두 사람의 눈이 진열대 구석으로 향했다.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양주병을 진열하던 남자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거기서 제가 왜 나와요?”
“새로 온 알바생이야. 신참. 이제 한 달 됐어.”
마마가 남자를 돌아보더니 말했다.
“이쪽은 우리 가게 최연소 단골. 다음에 오면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방금 거 그대로 주면 돼.”
“알겠습니다.”
무슨 메뉴를 시켰는지 알고 있기는 할까, 그런 생각이 들 만큼 남자는 이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서글서글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말투는 무뚝뚝 그 자체였다.
마마가 턱짓으로 명함을 가리켰다.
“아무튼 이력서라도 한 번 보내봐. 듣자니 급여도 괜찮고 어지간한 일은 대표가 직접 처리해서 비서는 거들기만 하면 된다더라. 합정역 근처니까 걸어서 다니면 되고. 얼마나 좋니?”
“그렇기는 한데…”
“우리 하루, 아직 잔고 충분하구나?”
윽.
하루가 당했다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마마는 기다렸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반박할 말을 사전차단하는 건 마마의 전매특허였다. 당할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이런 게 바로 연륜이라는 걸까.
3초쯤 이어진 눈싸움의 결과는 뻔했다. 명함을 주머니에 넣은 하루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알겠어요. 일단 가볼게요. 하긴 내가 지금 이것저것 가릴 처지인가.”
“그렇지. 착하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머릿속이 복잡해져 하루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목덜미를 간신히 덮는 머리카락이 뒤따라 움직였다.
‘직장 생활 중 가장 기쁜 일은 퇴사’ 라는 말을 처음 한 사람은 때려칠 때 돈이 많았던 게 틀림없다. 아니면 관두고 5분쯤 지나고 저 말을 했거나.
인수인계를 끝마치고 회사를 나서던 날. 10분정도 찾아왔던 행복이 사라지자 막막함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계기가 계기인만큼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나름 안정적이던 생활에 적신호가 켜진 것만은 확실했다. 또다시 경력 뻥튀기와 자소설에 목숨거는 취준생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는데…
주머니를 뒤적여 명함을 꺼냈다.
비서는 생소한 직업이었다. 드라마나 영화 같은데서 본 게 전부였다.
걱정이 앞서는 한 편 마음 한 켠에서 자신감이 생겨났다. 알코올이 만들어낸 근거없는 자신감이었지만 뒤늦게 이유가 떠올랐다.
이제와서 못 할 일이 뭐가 있을까, 상사 얼굴에 잡채도 던져봤는데.
반 년 만에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왔지만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다. 집에 도착하고 나면 그 대표라는 사람을 샅샅이 조사해볼 생각이었다. 태생적으로 높으신 분을 보좌하는 직업인만큼 그 분의 스타일이 모든 걸 결정할 터였다.
사실 어떤 사람이든 크게 상관없었다. 인간 언저리에 머물렀던 김 부장보다 낫기만 하다면야.
“하암…”
둥둥 떠다니던 생각은 곧 자취 메이트에게로 흘러갔다.
[아직 잘 모르겠어요]
궁금한 게 많았다. 그때 그 쓴웃음의 의미도, 한국어도 영어도 하지 못하는 그녀가 왜 이 먼 외국까지 오게 되었는지도. 생판 남인 자신에게 같이 살자고 한 이유마저도.
하지만 묻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 역시 충동적으로 정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충동이 내린 결정이라면 스스로도 이해할 시간이 필요하리라. 게다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던 거라면 이쪽과 별로 다르지 않다. 신림에서 망원인지, 일본에서 한국인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음, 아무리 그래도 그 두 개는 좀 다른가?
뭐,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리.
의식과 논리가 흥청망청 뒤섞이는 사이 발걸음은 지하철로 흘러들어갔다. 오랫만에 맞이하는 기분 좋은 밤이었다.
◇ ◆ ◇
[아직 잘 모르겠어요]
번역기 이력을 살피던 손가락이 멈추었다.
이사하는 날 밤에 나누었던 대화였다. 미야는 턱을 괸 채 지긋이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었지만 하루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사실 물어보았다고 해도 대답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으리라. 아직 스스로도 답을 찾지 못한 것들 투성이였으므로.
다만 같이 살자는 말을 꺼낸 이유라면 알고있었다. 그녀라면 묻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켄타에 대한 것만은.
“それでは授業を始めます。”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