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それでは授業を始めます。”
(그럼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칠판 앞에 선 선생님이 분필을 집어들었다. 미야는 휴대폰을 덮고 노트와 볼펜을 꺼냈다.
일본어 학원의 선생님이 되는 일은 맥이 빠질 정도로 쉬웠다. 쪽지를 본 학원의 원장 선생님께서 미야에게 직접 연락을 주셨던 것이다.
때마침 구인난에 시달리는 중이었는지 원장 선생님은 그녀를 꽤나 반기는 기색이었다. 한국어를 못한다는 점이 걸렸지만 원장 선생님은 상관 없어요, 라고 말했다. 보조 설명이 필요한 건 중급반까지. 나머지 수업은 온전히 일본어로만 진행된다고 했다.
간단한 면담을 마치고 나자 원장 선생님은 곧바로 미야에게 수업을 참관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면접을 보기 위해 온 자리는 그대로 출근 첫 날이 되었다.
교실 맨 뒤에 앉은 미야는 수업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회화 수업의 진행방식은 단순했다. 선생님이 칠판에 몇 가지 표현을 적고 한국어 뜻을 알려주고 나면 학생들은 그 표현들을 사용해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앉은 건 그 때문인 것 같았다.
중급반 수업이라고 했지만 보조 설명은 거의 없었다. 학생들도 열성적이어서 ‘수업 중 한국어 사용 금지’라는 규칙을 잘 지켰다.
미야의 눈이 반짝였다.
학창시절에 만났던 선생님들은 늘 처음부터 선생님이었을 것만 같았다. 그들 모두가 이런 준비 과정을 거쳤을 거라 생각하니 신기한 기분이었다. 선생님의 탄생이라니, 마치 알을 깨고 나오는 병아리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수업이 끝나고 나자 원장 선생님은 미야에게 강사용 교재와 직원 카드를 건넸다. 직원 카드에는 미야의 이름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병기되어 있었다.
그녀가 서투른 한국어로 잘 부탁드립니다, 라고 말하자 원장 선생님은 일본어로 대답해주셨다.
돌아오는 길은 멀지 않았다. 카페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길을 지나치면 곧바로 집이었다.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미야는 연신 직원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원장 선생님께는 누군가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녀의 집에는 여전히 켄타와 함께 읽었던 동화책들이 쌓여 있었다. 펼쳐 볼 엄두가 나지 않았을 뿐.
신호가 바뀐 후에도 미야는 한동안 걸음을 떼지 못했다. 교재가 든 가방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 ◆ ◇
“아, 왔어요?”
미야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하루는 거실에서 노트북을 하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가려던 미야는 그녀가 있는 쪽으로 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응? 왜요? 할 말 있어요?”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가며 하루가 물었지만 미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뿐이었다. 곧 그녀가 하루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뭐 하고 있어요?]
“사전 조사요. 앞으로 일하게 될지도 모르는 회사의.”
그러고 보니 직장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지.
그런데 노트북에 뜬 건 영 엉뚱한 화면이었다. 구직 정보나 회사 사이트가 아니라 왠 잘생긴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는 게 아닌가.
“이 회사 대표에요. 대표.”
미야의 눈빛을 눈치챈 하루가 황급히 말했다. 그러고보니 남자의 손에는 특이하게 생긴 기계가 들려있었다.
하지만 미야의 눈에 그런 건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사진을 본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으리라.
떡 벌어진 어깨와 대비되는 작은 얼굴과 새하얀 피부. 와이셔츠 너머로 드러나는 탄탄한 몸의 윤곽까지. 기계나 회사 홍보를 위해 찍었을 사진은 완전히 남자의 화보가 되어있었다.
미야의 머릿속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그걸 한국어로 뭐라고 하더라…
“어때요? 잘생겼죠?”
“훈남, 이에요.”
“그런 표현도 알아요? 한국어 엄청 잘 하는데?”
미야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루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나, 어쩌면 이 사람이랑 같이 일하게 될지도 몰라요. 비서 면접 보기로 했거든요. 내일 쯤 연락해볼 생각인데 좀 기대되네요.”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게요. 고마워요.”
미야는 웃으며 방 쪽으로 걸어갔다. 허전해졌던 마음이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
하루의 눈이 멀어져가는 그녀에게 머물렀다.
서로를 알게 된 지, 그리고 같이 살게 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꽤나 친해져 있었다. 나이도 세 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데다 청소나 분리수거 같은 부분에서 성격이 잘 맞은 덕분이었다.
마마는 믿지 않았지만 언어 문제도 잘 해결되었다. 미야는 한국어를 곧잘 알아들었고 하루는 말을 천천히 하는 습관이 생겼다. 번역기 어플리케이션까지 합세하니 언어의 장벽 같은 건 어느새 잊혀진 지 오래였다.
혼자 남은 하루는 다시 노트북으로 눈길을 돌렸다. 반쯤 마신 맥주 캔에서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카페가 연상되는 이름과 달리 비움은 VR/AR 게임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었다. 게임이라면 담을 쌓은 하루는 처음 들어보았지만 업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잘 나가는 회사인 모양이었다.
대표 이사인 박시우는 최근 몇 개월 사이 성공한 젊은 사업가의 표본으로 각종 매체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의 개발자로 시작해 스물 넷에 비움을 창업하고, 3년만에 게임 ‘에이라일 워즈’로 대박을 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홈페이지에 쓰여진 이력만 해도 몇 번이나 스크롤을 내려야 했다.
대단한 스펙과 잘생긴 얼굴에 눈이 갔지만 동시에 살짝 불안해졌다. 이런 엄청난 사람이라면 스케줄도 여간 빡빡한 게 아닐 터였다. 그리고 그건 비서 후보가 좋게 받아들일 수 있는 소식은 아니었다.
“후.”
하긴 내가 지금 그런 거 가릴 처지겠냐만은.
찬밥 더운 밥 가리는 것도 선택권이 있어야 가능한 법. 아직 면접은 고사하고 이력서도 내지 않았는데 뭐가 좋고 나쁜 소식이라는 말일까.
달달했던 김칫국의 끝맛은 꽤나 씁쓸했다. 남은 맥주를 원샷한 하루는 화면을 다시 워드 프로세서로 돌렸다. ‘이력서’라는 글자 아래로 몇 줄 되지않는 경력들이 적혀있었다.
한숨과 함께 하루의 손가락이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디 낭낭하게 채운 혈중 알코올 농도가 이 작고 소중한 경험들을 그럴싸하게 포장할 수 있기를 빌며.
◇ ◆ ◇
며칠 뒤, 합정의 스타트업 회사 ‘비움’.
십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의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타자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회의가 벌어졌다. 영어와 한국어, 그리고 알 수 없는 언어들이 뒤섞여 들려왔다.
유리벽 너머와 이쪽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하루는 긴장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코올의 힘은 굉장했다.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던진 이력서였는데 정말로 연락이 왔던 것이다.
면접 일자와 장소가 적힌 메일을 읽으며 하루는 이 회사가 게임회사의 탈을 쓴 다단계나 사기 업체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마마가 추천한 곳이니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렇지 않고서 그런 이력서를 보고 면접을 보자고 한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착하고 보니 그 생각은 더 선명해졌다. 스타트업이라고 하기에 콩알만한 회사를 생각했지만 번듯한 건물의 두 개 층을 전부 쓰고 있었다. 게다가 지하에는 직원 전용 카페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나름 중견이었던 전 회사보다 규모는 작지만 훨씬 실속있어 보였다. 특히 분위기 면에서 더더욱.
둘러보면 둘러볼수록 의문이었다. 이런 곳에서 왜 자신에게 면접 기회를 준 걸까? 초라한 스펙을 보고나니 곁에 두고 직접 조지고 싶어지기라도 한 걸까?
자꾸만 차가워지는 손끝을 맞잡았다. 아르바이트 시절부터 수십 번은 보았을 면접이지만 오늘따라 더 긴장되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의 문이 열렸다.
“이하루 씨?”
“네…네!”
하루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안경을 쓴 남자가 유리문을 반쯤 열어젖힌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이력서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이쪽으로.”
스스로를 신 팀장이라 소개한 남자는 하루를 지하 1층에 있는 카페로 데려갔다. 그가 쓰러지듯 의자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전임자가 말도 없이 그만두는 바람에 그동안 어찌나 고생했는지.”
“저, 그럼 면접은 여기서 보는 건가요?”
지하라고는 하지만 한쪽에 난 통창 덕분에 햇빛이 잘 들어왔다. 스피커에서 낡은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구석에 걸린 스크린에서는 흑백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덕에 긴장이 풀리기는 했지만 면접에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었다. 신 팀장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스펙도 이만하면 준수하시고, 무엇보다 마마의 추천으로 오신 거잖아요? 그 분이 인정하신 거라면 이미 합격이나 다를 바 없어요.”
“하지만.”
“오랫동안 인사팀에서 일하셔서 그런가, 저보다 보는 눈이 훨씬 정확하시더라고요.”
인사팀에서? 마마가?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더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신 팀장의 휴대폰이 진동했기 때문에.
“네 대표님!”
다급하게 전화를 받은 신 팀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네 맞습니다. 지금 카페에서 이야기 나누는 중입니다. 네. 네.”
남자는 마치 대표가 눈앞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했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두 손으로 휴대폰을 공손히 감싸기까지 했다.
그때였다.
“네? 지금 바로요?”
신 팀장과 하루의 눈이 마주쳤다.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가 의미하는 건 하나 뿐이었다.
망했다.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해놓고 있겠습니다. 네. 네.”
뚝.
전화를 끊은 신 팀장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그가 이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속삭였다.
“자 하루씨, 제 말 똑똑히 새겨들으셔야 합니다.”
“네?”
“시간이 없으니까 간략하게 말씀드릴게요. 지금 대표님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시거든요?”
미사일이 날아온다는 말도 이것보다는 덜 다급할 것 같다. 하루는 덩달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긴장한 걸까, 대표가 같이 일할 비서를 뽑는 자리에 오는 게 딱히 잘못된 건 아닐텐데?
혼란 속에서 신 팀장은 하루가 숙지해야 할 사항들을 빠르게 읊었다. 대표가 오면 무조건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하기, 먼저 입 열지 않기, 쓸데없는 말 하지않기 등등…
“구체적인 메뉴얼은 나중에 따로 보내드릴게요. 오늘은 일단 그 정도만 지켜주세요. 아시겠죠?”
하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회사보다 조금 빡빡하기는 하지만 딱히 유별난 수준은 아니었다.
“마마께 들어서 잘 아시겠지만 상당히 예민하신 분이라 신경쓰실 일이 많으실 거에요.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미소와 친절을 잃으시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무슨 일이 있어도, 라고 남자는 한번 더 강조했다. 덕분에 하루의 불안도 급상승. 오면 안 될 곳에 발을 들여놓은 기분이었다. 애초에 아무것도 들은 게 없는데?
신 팀장은 서류 봉투에서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근로계약서와 펜이었다.
“한번 쭉 훑어보시죠. 대표님 오시면 같이 읽고 싸인하게.”
하루의 눈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래 이런 걸 꼼꼼히 살피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저기, 여쭤볼 게 있는데요.”
“네? 네.”
“저 정규직이었나요?”
중소기업에서 비서를 정규직으로 뽑는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알기로는 2년, 혹은 그보다 짧은 계약직이 대다수였다.
그런데 신 팀장이 건넨 계약서에는 시작일만 표시되었을 뿐 종료일이 적혀있지 않았다. 그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맞습니다. 원래는 2년 계약직이었는데 이번 모집부터 바뀌었어요. 수습기간이 3개월 있기는 하지만요.”
뜻밖의 희소식이었다. 계약직을 예상하고 왔기에 더 그랬다. 3개월동안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후에는 미래 걱정없이 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신 팀장의 행동 때문일까, 정체 모를 불안이 마음 속을 떠나지 않아 하루는 연신 계약서를 훑었다. 어쩐지 이 안에 정답이 적혀있을 것만 같았다.
비서로서는 드문 정규직 계약과 수습기간 3개월, 게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미소와 친절을 잃지 말아라...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네?”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거쳐온 하루가 이 말의 의미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물었다.
“그동안 몇 명이나 그만두신 거에요? 대표님 비서.”
침묵.
신 팀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을 벌린 채 굳어버린 걸 보니 제대로 짚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하루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나왔다.
“그냥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뒤늦게 놀라는 건 질색이라서요. 제가 마마한테 전달받은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런데-”
“아무것도요?”
남자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안경이 흘러내려 코끝에 걸렸다. 흡사 울 것 같은 표정이 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왜…요?”
라고 되물었다.
그때였다.
“신 팀장님?”
하루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신 팀장의 초점이 흐릿해졌다 돌아왔다. 돌아보는 하루의 눈앞에 손이 내밀어졌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움 대표 박시우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