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쩌려고 그래, 도대체 어쩌려고 회사를 그만 둬, 어?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매서웠다. 하루는 지지 않고 소리쳤다.
"그러니까 다 알아서 하겠다니까요.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한건데 이러기에요?"
-걱정을 안 시켜야 안 하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잖아요. 때려칠 이유가 있었다니까요? 제발, 딸 좀 가만 믿어보면 안 될까?"
-무슨 일은 무슨. 사회생활 원래 다 그래. 사람들이랑 부대끼며 사는 게 그럼 쉬울 줄 알았니? 학교 다닐 때랑 똑같은 줄 알았어?
안 쓰던 존댓말까지 써 가며 말했지만 엄마, 하 여사는 단호했다. 말발도 굉장했다. 누가 소싯적에 교사 아니랄까 봐, 하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엄마 진짜..."
전화가 길어졌다. 하 여사는 숨도 쉬지 않고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딱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본가로 돌아와라. 아빠 일 도우면서 새 일자리 알아봐라.
하루의 입이 몇 번이나 열렸다 닫혔다. 하고 싶은 말을 애써 참을 때 나오는 행동이었다. 참다못한 그녀가 한층 더 큰 목소리로 외쳤다.
"됐어요. 그 촌구석에서 일을 구하긴 어떻게 구해? 지하철이야, 끊어!"
뚝.
전화가 끊어졌다. 하루는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벅벅 긁으며 분노를 삭히는 그녀에게 사람들의 이목이 잠시 모였다 흩어졌다.
하루가 김 부장의 얼굴에 잡채를 집어던진 건 3주 전 회식 자리에서였다.
김 부장은 공공의 적이었다. 꼰대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일처리는 느릿느릿, 트집은 생활. '일은 해가 진 뒤에'라는 근면성실한 마인드 탓에 야근은 기본에 회식도 좋아했다.
경쟁사가 심어놓은 스파이라는 소문마저 도는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신입사원 이하루는 달랐다.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대학 시절 온갖 아르바이트를 섭렵하며 수많은 진상들을 만나봤다. 가끔 이유도 없이 야근을 해야 할 때는 화가 났지만 편의점, 영어학원, 사무보조, 행사장 안내, 마트 시식코너를 거치며 만났던 다채로운 꼰대들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문제는 김 부장이 무능한데다 손버릇도 나쁜 상사였다는 점이다.
회식 때마다 그는 하루가 옆자리에 앉기를 고집했다. 다른 사람이 오면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그때마다 하루는 영어학원에서 만났던 대머리 원장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정수리가 허전한 것도, 자꾸 술을 따르게 하는 것도, 실수인 척 손등을 스치는 것마저도.
불쾌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녀 편을 들며 김 부장을 욕했지만 하루는 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회 생활이 다 그런 거지, 그런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참고 넘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회식 때마다 끊이지 않던 수작은 마천루 같던 하루의 인내심마저 무너뜨렸다.
어깨에 기댄 채 헤롱대는 것까지는 참아줄 수 있었지만 글쎄, 실수인 척 손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게 아닌가.
쩔쩔매는 그녀를 보다 못한 주변에서 두 사람을 떼어놓으려 하자 부장은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해대며 삿대질을 해댔다.
하루의 이성이 끊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정신을 차린 하루의 눈에 보인 건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동료들, 그리고 눈 코 입 할 것 없이 잡채 범벅이 되어 기절한 김 부장의 얼굴이었다.
고소하겠다며 노발대발하던 김 부장은 의외로 잠잠했다. 일이 커지면 불리해진다는 걸 안 건지 최소한의 양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다음 날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출근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똑같았다. 변한 거라곤 하루가 멀다하고 삼겹살 먹으러 가자던 그의 입에서 회식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일어났던 일이 없었던 게 될 수는 없다. 가만히 있었을 거라면 잡채 접시를 집어들지도 않았으리라.
며칠째 자신을 외면하는 김 부장에게 하루는 말했다. 신고를 하던 언론에 제보를 하던 그냥 넘어갈 생각 없다고. 그러니 알아서 잘 처신하시라고.
돌아온 건 지극히 그 다운 반응이었다. 지금 누구 앞에서 목소리 높이는 거냐고,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악에 받혀 소리치는 얼굴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차라리 잡채 범벅일 때가 보기 좋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성희롱에 폭언이 더해졌다. 사람들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폭행이 추가되었을지도 모른다. 김 부장의 죄목이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동안 하루는 동료들의 손에 이끌려 탕비실로 갔다.
'하루 씨 대단하다. 난 절대 그런 말 못했을 것 같아.'
그곳에서 커피를 건네던 동료가 했던 말을, 하루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하루 씨, 왜 일을 크게 만드려고 해?'
.
.
.
지하철은 한산했다. 하루의 눈길이 시계로 향했다. 12시 10분. 평소 같았으면 한창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있을 시간이었다.
그 날 이후 김 부장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이번 일이 윗선에게 알려져 한바탕 곤욕을 치렀다고 들었다. 며칠 뒤 그가 징계 대신 무급 휴가를 받았고, 아이들이 있는 미국으로 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후련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웠다.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소문을 들은 다른 부서 직원들이 잘했다며 엄지를 치켜들었지만 쓴웃음밖에 줄 수 없었다.
연휴가 끝난 다음 날이었다. 언론사, 경찰민원포털, 알바 구직 사이트 사이를 방황하던 하루의 손이 사직서 파일로 향했다.
사유에 '일신 상의 이유'라고 적을 때는 조금 망설였지만, 때마침 자리로 온 동료의 얼굴이 굳는 걸 보자 그마저도 웃으며 채워넣을 수 있었다.
의욕이 사라졌다는 말이 옳았다. 김 부장이 사라진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던 탓이다. 그러니 그건 김 부장이 아닌 동료들의 이중적인 얼굴이 써내려간 사표였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하 여사한테 말할 수야 없지.
다시 걸려올 줄 알았던 전화는 의외로 잠잠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메시지가 도착했다.
- 알아서 해.
아빠에게서 온 거였다. 하루는 순간 웃음이 터질 뻔 했다. 이 정도면 나름의 응원 표시였다. 홧김에 나온 말이라면 메시지 대신 전화를 걸 아빠였기에 더더욱.
이사는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어젯밤 친구랑 통화를 하다 마음을 정했다. 망원에서 공인중개사를 하는 친구 어머니에게 얼굴도 비출 겸 겸사겸사 여쭤볼 생각이었다.
망원은 생소한 동네였다. 딱 한 번 아는 선배를 만나러 갔던 게 전부였다. 그러니 딱히 이유가 있어서 그곳으로 이사를 결정한 건 아니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친구 어머니의 공인중개사가 거기 있었다는 것 정도.
사실 어디든 좋았다. 회사가 보이지 않는 곳이라면.
당산을 지나친 지하철이 합정에서 멈췄다. 하루는 두리번거리며 환승통로를 찾았다. 바람이 매섭게 불어와 머리카락을 흐트려놓았다.
◇ ◆ ◇
"あの, ここで働きたいですが。"
(저기, 여기서 일하고 싶은데요.)
같은 시각, 망원의 한 일본어 학원.
여자가 입을 열자 데스크 직원들의 안색이 나빠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서로를 보던 직원들이 어물어물 말했다.
"어, 그게 저기......."
"선생님 아무도 안 계셔? 전화라도 걸어 봐, 얼른!"
평소라면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직원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점심시간. 서류정리나 안내를 돕는 아르바이트생들이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제 겨우 히라가나를 뗀 그들이 할 줄 아는 일본어는 없었다. 기껏해야 아리가또, 정도일까.
"캐, 캔유 스피크 잉글리시...?"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물었지만 돌아온 반응은 NO. 아르바이트생들의 얼굴이 다시 흙빛이 되었다. 어찌나 시무룩하던지 여자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을 정도였다.
그때 아르바이트생들 중 한 명이 스마트폰을 내놓았다. 곧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どういうご用件でいらっしゃいましたか。]
(무슨 일로 오셨어요?)
인간미라고는 없는 무뚝뚝한 목소리. 하지만 여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르바이트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스마트폰을 꺼내 뭐라고 적더니 그들에게 건넸다.
'여기서 일하고 싶습니다.'
문명의 이기가 언어의 장벽을 허무는 순간이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그제서야 안정을 되찾고 사무용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종이와 펜을 준 아르바이트생이 스마트폰을 내밀자 그, 정확히는 그의 스마트폰이 말했다.
[お名前と連絡先を教えてください。]
(성함이랑 연락처를 알려주세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종이에 무어라 적어 아르바이트생에게 건넸다. 그녀의 입에서 서툰 한국어가 흘러나왔다.
"미야, 미야자키 하루(宮崎 春)에요."
◇ ◆ ◇
미야가 귀가한 건 30분 뒤였다. 긴 복도를 지나 방문을 열자 콤콤한 냄새가 그녀를 맞이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여기저기 향수를 뿌렸지만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벌써 3일째 반복되고 있는 일이었으므로.
한국에서는 이런 방을 고시원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저렴하지만 시설은 캡슐호텔보다도 나빴다. 공용화장실은 간단한 샤워도 힘들만큼 비좁은데다 부엌에는 멀쩡한 요리도구가 없었다. 냉장고의 냉동 칸은 고장난 지 오래였다.
다다미가 석 장은 깔릴까 싶은 방은 방음이 전혀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살던 낡은 목조 건물 이상이었다. 통화 소리가 새어나가는 건 물론 방문을 닫아도 복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君が間違ったんじゃないの。 そうじゃない? 昨日も..."
(네가 잘못한 거잖아. 아니야? 어제도...)
미야가 외투를 벗고 앉았을 때 복도에서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와 함께 고시원에 둘 뿐인 일본인이었다.
504호에는 미야와 같은 Y대에 다니는 학생이 살았다. 올해 21세에, 와세다 대학 국제 교양 학부에 다니다 유학생으로 이곳에 왔다. 그곳을 졸업하려면 1년의 해외유학이 필요하다는 모양이다.
늘 한국인 남자친구와 통화하며 복도를 지나는데 항상 한국어로 이야기하다 엊저녁부터 일본어로 화를 냈다. 종종 칸사이벤을 쓰는 것으로 보아 오사카나 교토 출신인 것 같았다.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었지만 미야는 그녀에 대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미야의 방은 501호였는데도.
향수 기운이 가시자 다시 냄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담배, 혹은 오랫동안 빨지 않은 티셔츠에서 날 법한 불쾌한 냄새였다.
재차 향수를 집어들려던 미야는 한숨을 내쉬며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다. 오늘 날짜가 쓰여진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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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학원 알아보기
2. 우산 사기
3. 집 냄새 없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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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을 들어 첫 번째 항목을 체크한 미야는 잠시 고민하다 세 번째 항목을 지웠다. 그리고 대신 이렇게 적었다.
집 알아보기.
길게 지낼 생각으로 들어온 고시원이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3일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건강이 나빠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방세 몇 푼 아끼려다가 병원비가 더 나올 지경이었다.
근처에 부동산이 있는 걸 보아두었다. 한국은 일본과 달리 보증금도 돌려받을 수 있고 월세도 그리 비싸지 않다.
멘션이나 하우스는 힘들겠지만 비상금을 전부 털면 아슬아슬하게나마 1K(역주: 부엌이 따로 있는 원룸)짜리 스튜디오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외투를 챙겨든 미야가 마른 기침을 하며 방을 나섰다. 먹구름이 빠르게 움직여 햇볕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