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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USY Oct 23. 2024

#2 우리, 함께 살까요?


 하루(春), 봄이라는 뜻.


 봄처럼 살라는 뜻에서 아빠가 붙여주신 이름이었지만 미야는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후유(冬)' 쪽이 더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켄타와 처음 만난 건 미야가 막 대학교 2학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학과 사람들이 다 같이 간 벚꽃놀이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스즈키 선배는 그를 한국에서 온 유학생이라고 소개했다. 그가 한국 이름을 말해주었지만 발음이 어려워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서툰 일본어로 켄타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라며 입술을 오므리고 웃었다.


 더벅머리에 뿔테 안경을 낀 켄타는 순박한 인상이었다. 옷이 많지 않아 언제나 비슷한 인상이었지만 늘 깔끔하게 차려입었다. 종종 친구들에게 옷 좀 사입으라는 핀잔을 들어도 웃어넘길 뿐이었다.


 미야는 그런 그의 모습이 좋았다. 겉치레 없는 수수함을 동경한 걸지도 모른다. 그 무렵 그녀의 어머니는 세 번째로 만났던 남자친구와 헤어져, 실의에 빠진 채 온갖 화려하기만 한 옷들을 사 모으곤 했으니까.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취미도, 듣는 과목도 달랐지만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 패밀리 레스토랑에 모여 수다를 떨었다.


 커피를 몇 번이나 리필해가며 이야기를 나눴지만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켄타는 서툰 일본어에 한국어를 섞어서 말했고, 미야는 한국어를 아예 몰랐으니까.


 그러나 두 사람 중 누구도 이 답답한 모임을 그만 둘 생각은 없었다. 어느 날 미야는 어릴 때 보던 동화책을 들고 와 그에게 일본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켄타는 조금 귀찮아하는 기색이었지만 자신이 쓴 글을 보여주고 싶다는 미야의 말에 자리에 앉았다.


 켄타의 일본어는 날이 갈수록 유창해졌다. 간단한 한자도 겨우 읽던 그는 봄이 끝날 즈음 미야가 쓴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학교의 독서 토론 동아리에 입부 신청을 했다고 말해 그녀를 놀라게 했다.


 그즈음 미야도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켄타 특유의 느릿한 말투는 한국어를 말할 때도 그대로여서 미야가 이해하기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온전한 일본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말문이 막힐 때마다 켄타는 멋쩍은 듯 웃었다. 어쩌면 그 순박해보이는 모습은 서툰 일본어 때문인지도 몰랐다. 종종 한국의 친구들과 전화를 할 때의 그는 일본어를 쓸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나 전화가 끝나면 다시 유약한 모습으로 돌아와 미야에게 웃어보였다. 어쩌면 그 간극이 그에게 반하게 된 첫 단추가 아닐까 하고, 미야는 종종 생각했다.


 두 사람이 사귀기 시작한 건 매미가 울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어쩌면 그 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단지 미야가 그 무렵 알아차렸을 뿐이다. 


 사귀자는 말은 누구의 입에서도 나오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를 연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자 미야는 학교가 멀다는 핑계로 집을 나와 켄타의 방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장식에 불과하던 그 방 부엌이 제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라면이 사라진 찬장은 각종 조미료와 식재료로 채워졌다. 켄타의 휴대폰에서는 배달 앱이 하나 둘 지워졌다. 마주보고 앉아 식사를 하면서 미야는 문득 이런 게 행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행복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 해, 겨울이 가기도 전에 켄타는 죽었다.


 사고였다. 술 취한 기사가 몰던 트럭이 중앙선을 침범해 켄타가 타고 있던 택시를 덮쳤다. 


 구급차가 왔을 때는 이미 손쓸 수 없이 늦은 후였다. 바쁘게 택시를 잡아타던 켄타의 뒷모습은 그렇게 미야가 기억하는 마지막이 되었다.


 장례는 집 앞 사찰에서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훼손이 심해 한국으로 옮기기가 여의치 않았던 탓이다.


 켄타의 어머니는 초췌한 기색이었다. 한국에서 이곳까지 오는 동안 몇 번이나 쓰러지셨다고 했다. 


 더 이상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듯 건조한 눈으로 손님들을 맞으셨는데, 그동안 내내 미야의 손을 잡고 계셨다. 


 미야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은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의 한쪽 얼굴을 덮는 화상 자국도, 그의 아버지가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도 묻지 않았다.


 조문객은 많지 않았다. 학교 사람들과 친척 몇 명이 다녀간 게 전부였다.


 돌아가는 이들에게 소금 봉지를 나누어주면서 미야는 며칠째 어수선했던 마음이 조금씩 정리됨을 느꼈다. 이제서야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나갈 무렵 한 남자가 찾아오면서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사사키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본인이 켄타의 남자친구였다고 말했다. 학교의 독서 모임에서 만났다고 했다.


 처음에는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닌가 했지만 그의 앨범에는 켄타와 그가 다정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이 수십 장이나 있었다. 연인이 아니라면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까이 붙어, 언제나 손을 잡은 채였다. 


 그 중에는 미야가 선물해 준 스웨터를 입고 있는 사진도 있었다.


 미야는 할 말을 잃었지만 어머니는 그 남자를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사사키 씨는 어머니에게 진작 뵙지 못해 죄송하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미야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입술을 짓씹으며, 어머니께서 일본어를 알아듣지 못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미야는 켄타의 집 신발장에서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몇 봉지를 뜯은 건지 모를만큼 사방에 비닐이 널부러져 있고 구두에는 소금이 하얗게 쌓여 있었다.


 구두를 벗어든 미야는 안으로 들어가 방 구석구석 남은 소금을 뿌렸다. 그와 함께 밥을 먹었던 식탁에도, 나신을 드러내며 부끄러워했던 침대보에도, 나란히 걸터앉아 입술이 아프도록 키스했던 창틀에도. 


 마음 대신 소금이 까맣게 타들어가, 그와 함께했던 추억이 전부 사라지기를 빌면서.


 차라리 끝까지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이곳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이 그에게는 한낱 유흥에 불과했던 걸까. 그 모든 게 거짓이었다는 걸까.


 소금이 다 떨어지자 미야는 집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그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

 . 

 . 



 새해가 밝자 겨울은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하지만 미야에게는 예외였다.


 계절이 세 번 바뀌는 사이 켄타는 미야의 생활 깊숙히 자리잡았다. 어디서든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어딜 가도 그가 보이는 것 같았다. 사라진 그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자꾸만 미화되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어느 날 미야는 학교 게시판에 걸린 광고를 보았다. 한국의 Y대학교에서 하는 한국어 학당에 대한 내용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이제 한국이라면 진절머리가 났다. 오죽하면 자주 가던 신오쿠보(역주: 신주쿠 구에 위치한 지역. 코리안타운이 유명하다)의 상점가에도 발길을 끊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야는 절차를 밟고 있었다. 온라인으로 서류를 접수하고 수업료 입금도 마쳤다.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면서 그녀는 연신 내가 미쳤지, 라며 한국어로 중얼거렸다. 켄타가 알려준 것 중 가장 심한 욕이었다.


 원망에 그리움이 섞이면 애증이 되는 걸까. 미야는 켄타를 잊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워했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그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결정한 것일까, 아니면 잊고 싶다는 충동이 만들어낸 대답일까.


 고민이 길어졌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어느 쪽이든 죽은 듯이 살아가는 지금보다는 나으리라.


 엄마가 다섯 번째로 집을 나간 날, 미야는 창고에서 먼지 쌓인 캐리어를 꺼냈다.


 공항으로 가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두어 번 더 걸다가 포기했다. 또 어디서 엄한 남자 붙잡고 돈 빨아먹고 있을 게 분명했다.


 엄마의 프로필 사진을 누르자 몇 년 전에 주고 받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분명 아빠의 49재에 주고 받았던 이야기였다.


 미야는 한숨을 내쉬며 메시지를 남겼다. 집에 밥 해놓았으니까, 꼭 먹으라고.



 ◇ ◆ ◇


 "생각보다 비싸네요?"


 "요즘 부쩍 시세가 올랐어...아이고 어서와요. 잠시만 기다려줄래요?"



 부동산에는 이미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주인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중학생 쯤 되어보이는 남자아이가 미야에게 커피를 타 주었다.


 한쪽 벽면에 시세표가 붙어있었다. 사진을 찍자 거기 적혀있던 글자들이 일본어로 번역되어 덧씌워졌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방 하나짜리는 아예 없어요? 역에서 멀어도 상관없는데."


 "없어. 개강 시즌이라 1월 말부터 학생들이 엄청 찾아왔거든. H대나 Y대 애들은 다 이 주변에서 방을 구해. 가까우니까."


 "그건 그렇겠네요..."



 방 하나, 그러니까 1K짜리 스튜디오가 없다는 것만은 알아들었다. 아주머니는 몰라도 여자 쪽은 발음이 명확해 알아듣기 좋았다.


 그때였다.



 "그런데 하루야."



 놀란 미야가 돌아보았지만 아주머니는 여전히 여자 쪽으로 돌아앉아 있었다. 여자의 눈길이 잠깐 그녀에게 머물렀지만 이내 아주머니에게로 돌아갔다. 


 아주머니가 말했다.



 "방이 두 개면 역시 좀 부담스러울까? 하나는 창고로 쓰면 편할 것 같은데. 거실이 있으니까 손님 왔을 때 대접하기도 편하고."



 미야의 눈길이 여자에게 닿았다.


 저 사람도 하루라는 이름을 가진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국 사람들도 흔하지는 않지만 그 이름을 쓴다고 들었던 것 같다.


 망설이던 하루가 대답했다.



 "그건 너무 비싸서…그리고 제가 언제까지 수입이 없을지 모르거든요. 어차피 찾아올 사람도 없고."


 "그렇구나. 이걸 어째."



 미야는 휴대폰을 꺼내 번역기 어플리케이션을 켰다. 그리고 화면에 뜬 문장을 몇 번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저..."



 두 사람 앞에 선 미야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가 하루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저는 미야자키 하루입니다. 일본에서 왔슴미다."



 하루가 고개를 들자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서툰 한국어. 발음이 뭉그러지고 외워서 말한 탓에 어조도 없다. 아마도 일본 사람인 듯한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또박또박 말했다.



 "우리...함께 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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