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연주 May 30. 2017

여유로운 척, 홍차 마시기 베스트 3

눈코 뜰 새 없을 때는 지금 내가 얼마나 넋이라도 있고 없는 상태인지 깨달을 시간도 없다. 한숨 돌리고 나서야 오늘은 차 한 잔 마실 틈도 없었구나, 중얼거리게 된다. 


그렇다, 차 한 잔. 홍차와 그를 둘러싼 집기며 간식은 여유의 상징이다. 영국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티타임을 즐긴다고 놀리는 장면에서는 주로 전쟁터에서 포탄이 터지는데도 티테이블은 먼지 한 톨 없이 차려져 있고 찻잔을 든 손은 미동 없이 굳건하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은 티코지부터 샌드위치까지 챙겨서 애프터눈 티를 즐기겠다는 마음이 여유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미 머릿속에서는 그런 이미지가 몇 단계의 비약을 거쳐서, 카페인을 투약하는 마음으로 복용하는 커피처럼 머그잔에 담아서 모니터에 눈을 고정한 채로 마시더라도 그것이 홍차이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아진다. 마치 여유를 부리고 있는 듯한 안정감이 생기려고 한다.


그러니 홍차를 둘러싼 기구들은 쓸데없이 예쁠 것이 미덕이다. 티잔과 소서의 레이스? 티포트의 꽃무늬? 쓸모로 따지자면 굳이 달려야 할 이유도 그려야 할 필요도 없지만 티타임을 둘러싼 모든 것은 철저히 홍차주의 기준에 맞춰서 아름다워야 한다. 그래서 캡슐 하나로 커피를 내려 마감을 하는 지금처럼 조급하고 안달이 날 때는 인터넷으로 찻잔을 훑어보기라도 한다. 그리고 티포트를 살핀다. 각설탕도 없지만 왠지 슈가 포트가 갖고 싶다. 재봉틀도 없지만 광목을 드르륵드르륵 박고 자수를 놓아서 티코지를 만들고 싶다. 그러고 보니 아직 자수도 놓을 줄 모른다. 응?


이렇듯 마치 여유가 넘쳐서 정신줄을 놓은 듯, 혹은 여유로웠던 시간이 그리운 나머지 넋두리를 늘어놓듯 찬양론으로 얼룩진 서두를 읊조리게 되는 것도 홍차가 여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쉼표 하나 찍어도 숨이 가쁠 정도로 마음 조급한 사람은 오늘도 괜히 여유로운 척 홍차를 탄다. 


홍차도 그때그때 마시고 싶은 스타일이 다르다. 원인을 따지자면 날씨나, 온도나, 기분이나, 직전 식사의 염도 등이 있겠다. 어쨌든 선호도로는 1위가 따뜻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 2위는 아이스티, 3위가 밀크티다. 


처음 시작을 함께해서인지 홍차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잉글리시 브렉퍼스트가 떠오른다. 요리가 대체로 그렇듯이 홍차를 타는 법도 생략하려면 어디까지나 생략할 수 있다. 하지만 홍차는 내 마음속의 뭐다? 여유. 그래서 조금이라도 편해보려고 티백을 사더라도 홍차를 우릴 때는 다음의 과정을 거친다. 


첫째,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서 머그잔에 부어 잔을 데운다. 둘째, 포트에 물을 부어서 팔팔 끓인다. 셋째, 물이 끓으면 잔을 데운 물을 버리고 티백을 넣은 다음 정해진 분량만큼 물을 콸콸 붓는다. 뚜껑이 될 만한 것을 찾아서 덮는다. 넷째, 차를 우릴 시간이 절반 정도 흐르면 뚜껑을 열고 티백을 위아래로 열심히 흔든다. 다시 뚜껑을 덮는다. 다섯째, 뚜껑을 열고 티백을 버리고 마신다. 이것이 내가 홍차를 타는 방식 중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컵을 데우는 과정만 생략해도 훨씬 간단해지겠지만 물의 온도를 최대한 떨어뜨리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덥거나 목이 말라서 아이스티를 마시고 싶어 지면 평소보다 찻잎을 두 배로 넣어 진하게 우린다. 아이스티에 대해서 구애받아 마땅한 원칙이 있다면 첫째로 아주 쨍하게 차가울 것, 둘째로 단맛은 살짝만 낼 것, 셋째로 아직도 쨍하게 차가울 것이다. 물과 사이다를 넘어서 요구르트까지 다양한 냉침을 하기도 하지만, 에스프레소 샷과 콜드 브류의 차이처럼 냉침 아이스티와 뜨겁게 우려서 얼음을 섞은 아이스티는 우러나온 풍미가 절대적으로 다르다. 너무 여리고 향긋한 콜드 브류는 취향에 맞지 않아서 뜨겁게 우려 냉장고에 넣어두는 편을 선택한다. 


3위인 밀크티는 어딘가에 어리광을 부리고 싶을 때 마시고 싶어 진다. 그럴 때는 오직 우유를 데우거나 밀크티를 끓일 용도로 구입한 노다호로 밀크팬을 꺼낸다. 여기에 우유를 붓고, 물과 찻잎과 설탕을 넣어서 바로 끓일 수도 있지만 조금 덜 지저분하게 만들고 싶으므로 찻잎은 따로 거름망에 담아서 찻잔에 걸쳐둔다. 여기에는 반드시 웨지우드의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를 사용한다. 돌돌 말린 아삼이라서 빠르고 진하게 우러나기 때문이다. 우유가 따뜻하게 데워지면 아주 천천히 찻잎에 붓는다. 짙은 갈색으로 밀크티가 우러난다! 설탕을 조금 넣어서 섞은 다음 마신다. 


아무리 복잡하게 만들어도 5분이 채 걸리지 않는데 왜 바쁠 때는 괜히 그 정도 여유도 없는 것처럼 느껴질까. 지금까지 여유라는 단어를 열 번 사용했다. 아마 다른 곳보다 일단 내 마음에 여유를 찾아야 할 듯하다. 그러니 홍차를 타기 위해 일어나야지. 모두들 자기 나름대로 홍차를 마시며 한 숨 돌릴 수 있기를 바라며.


Writing&Drawing 정연주

  Blog: 『이름을 부르기 전까지』 http://nonameprojectstory.tistory.com/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