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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주 Feb 05. 2019

여행길 마트 방문기


맛집에 찾아가고 요리책을 사고 조리 도구를 구경하는 틈틈이 관광을 하는 여행자. 이렇게 오로지 잘 먹기 위해서 다니는 내가 여행에서 유일하게 음식과 관련하여 하지 않는 일이 있다면 '요리하기'다.


물론 쿠킹 클래스는 별개다. 그건 누가 나 대신 메뉴를 결정하고 장을 봐다가 재료를 소분해서 딱 필요한 만큼 손질해서 준비해 주고, 설거지도 내 몫이 아니니까. 집에서도 누가 착착 보조해서 나는 일필휘지로 프라이팬만 휘두르면 된다면 매일 만한전석이라도 차릴 수 있겠다. 계획부터 설거지까지 이어지는 요리의 모든 과정을 사랑하지만, 그렇다고 요리가 노동이라는 점이 바뀌지는 않는다. 익숙지 않은 장소에 도구와 재료까지 부족한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래서 여행 중에는 호텔이 아니라 에어비앤비처럼 주방이 있는 곳에 묵더라도 직접 요리는 하지 않는다. 반조리 식품도 거절한다. 정 선택지가 없거나 반대로 심히 먹어보고 싶은 재료가 있을 경우 내가 하는 최대한의 요리 행위는 '조립'에 가깝다. 빵을 갈라서 치즈와 햄을 끼우거나, 감자칩으로 감자 샐러드를 떠먹거나, 포장해 온 요리가 너무 짜서 아보카도를 잘라 곁들이는 식이다. 그 외에는 복숭아나 무화과처럼 껍질을 벗길 필요가 없는 과일을 씻거나 요구르트 뚜껑을 따고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는 정도가 최대한일까. 그저 여행을 할 때는 최대한 내가 만든 것보다 맛있는 것들로 점철된 남이 만든 식사를 하고 만족감과 새로운 아이디어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다.


그러니 외국에서 마트에 들어갔을 때의 심정을 대체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어떤 나라에 가건 시장은 건너뛰더라도 마트에는 반드시 꼭 한 번 들린다. 사실 안 그래도 타고난 수집벽에 호더 기질이 다분한 푸디 Foodie인 나에게 마트만큼 신나는 쇼핑센터는 단언컨대 없다.


생존을 위한 요리와 상관없이 오로지 흥미만으로 마트 안을 돌아다니는 기분은 어린 시절에 엄마 꽁무니를 쫓아다니면서 과자를 하나라도 더 집어넣으려고 두근두근 눈치를 살피던 때와 꼭 닮았다. 납작복숭아랑 자두랑 배 중에 뭘 살까, 그냥 다 살까? 귀국 전에 다 익어서 먹기 좋을 만한 아보카도를 골라보자! 내가 좋아하는 길쭉한 마카로니 샐러드가 있네! 여기 맥주랑 마셔야지! 계속 반쯤 흥분한 상태라 모든 생각에 느낌표가 붙어 있다.


보통 마트 초입에는 신선 식품을 진열하는 구조 자체도 시작부터 사람을 흥분하게 만드는 것에 한몫한다. 원래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보이는 야자수나 유달리 채도 높은 화려한 꽃송이에서 타국에 왔다는 실감을 제일 직접적으로 느끼기 마련이다. '제주도에서 파인애플이 재배됩니다'라는 뉴스를 보면 지구온난화가 피부로 느껴지고, '기르던 바나나에 꽃이 피었어요'라는 소식을 들으면 폭염의 심각성이 새삼 와 닿는다.


그러니 시원한 마트에 들어서자마자 두리안이며 유려한 곡선의 서양배, 이름도 모양도 귀여운 도넛 피치(납작복숭아), 냉동 아닌 망고스틴을 보면 내가 진짜 여행 중이구나! 싶을 수밖에. 그중에서 딱 먹을 만큼만 종류와 개수를 한정해서 골라내는 것도 일이다. 안녕, 사쿠란보야. 너는 내가 다음 여름에 와서 꼭 먹어 줄게. 오늘은 백도랑 가야겠어.



그나마 날로 먹을 수 있는 과일은 다음에도 기회가 있으니 아쉬움이 덜한 편이다. 그 옆으로 이어지는 채소 구역으로 넘어가면 여행 중에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몸통보다 커다랗고 싱싱한 이파리를 자랑하는 당근과 래디시에 비트, 울퉁불퉁한 체리모야, 손톱만 한 마이크로토마토, 유리 장식처럼 생긴 바다포도를 보고 있으면 뭐라도 가져가서 만들어보고 싶다.


현지 식당에서 완전히 손질하고 조리한 상태로 나오는 채소를 흙 묻은 원형 그대로 보는 생동감 넘치는 만족감은 정말 아는 사람만 안다. 정말 아쉽다. 과일은 어지간하면 쓱쓱 잘라먹을 수 있지만 채소류는 기본적으로 날로 먹더라도 칼솜씨를 부리고 간을 하고 드레싱을 버무려야 하는데.


그리고 속이 결대로 찢어진다는 스파게티 호박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몇 년 전부터 겨우 보이기 시작한 땅콩호박을 보고 있으면 이걸로 당장 수프나 그라탱을 만들어야 할 것 같단 말이다. 감자를 품종대로 골라서 삶고 찌고 튀기고! 역시 에어비앤비를 잡을 걸 그랬나.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이 채소 코너만 지나가면 싹 잊어버릴 생각이라는 것을.


* <온갖 날의 미식 여행> 단행본이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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