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 소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계속 부딪혔고 그럼에도 서로를 너무 사랑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나는 경현을 아주 많이 사랑한다.
헤어지기 적당한 시기가 어쩌면 지금이겠다 싶었지만 일방적이고 싶지 않았다.
석기와의 첫 비행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
비행기를 한 번도 타본 적 없었다. 고소공포증이 심해서.
언젠가 비행기를 타게 된다면 옆자리엔 꼭 석기가 있으리라.
석기는 비행기를 두려워하는 나 때문에 휴가철에도 해외여행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 대신 우리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 선에서 항상 최장거리로의 여행을 떠났다. 차가 없으니 둘 다 많이 걸어야 했다.
언젠가 석기는 일주일 내내 신발가게 홈페이지를 들락날락거린 적이 있고, 겨우 발이 편해 보이는 커플 신발을 골라냈다. 덕분에 오래 걸을 때마다 그 신발을 꺼내 신는다.
"무서우니까 가까운 제주도부터 시작할 건데, 처음은 너야."
"그래, 나야."
석기는 항상 내 말투를 따라 했다. 내가 기지개를 켜며 내는 '이. 으. 이. 잇' 소리도 가로채갔다. 결혼을 그다지 꿈꾸진 않았지만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얘랑 살면 재밌겠다.
바람대로 첫 비행엔 석기가 함께 했다. 석기와 나는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손을 꽉 잡았다. 이륙하기 전부터 식은땀이 났다. 석기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줬다. 그리고 살포시 안아줬다. 이런 기억이 생겨서인지 다음 비행기도 거뜬히 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돌아오는 비행기엔 그가 없었다.
그는 나를 정리하기 위해 제주도에 온 것이다. 어쩐지 올 때 너무 길게 안아주더라니. 석기는 이럴 거면 왜 내 첫 비행을 함께 해 준 걸까. 어쩌면 그건 석기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어 서일수도 있겠다. 생각해 보니 석기는 단 한 번도 거짓 약속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게 '평생'이란 말도 한 적 없다. 연인끼리 한 번쯤은 해볼 법한 말들. 평생 같이 있자. 평생 사랑해.
여기서 쓸데없이 생각을 곱씹어봤자 석기는 나를 따라오지 않는다. 내가 타고 가는 비행기는 타지 않겠다고 말했다. 자기는 꼭 그다음 비행기를 탈거라고.
*
석기와 다르게 경현은 '평생'이란 말을 자주 했다. 그러나 지금 헤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평생 부딪혀야 한다. 부딪히는 날이 사랑하는 날보다 길어진다면 우리가 부서지지 않을 수 있을까.
경현과 나는 시작하기도 전에 헤어져야 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석기와 맞췄던 신발을 신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우습기도 하다. 그러니까 제때 헤어졌어야지.
경현의 우산 안에서 살포시 벗어난다.
"왜 그래요? 비 맞잖아요."
경현은 내쪽으로 다가와 우산을 기울였다. 나는 다시 한번 그 우산에서 벗어나 비를 맞았다. 지금 피해야 할 것은 비가 아니라 망가질지 모를 우리 관계다.
"경현 씨, 언제가 헤어지기 좋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