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글

1분소설

by 이은수

아빠는 새벽에 출근한다. 현관문 여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는 거실로 나왔다. 빌라 밖에서 우리 집이 환한 걸 보면 아빠가 알게 될까 봐 불을 켜지 않았다. 원목 서랍장 세 번째 칸에는 입고되지 못한 아빠의 시집 다섯 권이 남아 있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책 끝의 향이 서랍 속에 스며있다. 맨 밑에 깔려 있는 책을 꺼내고 서랍을 닫았다. 손전등을 비추니 표지에 희미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문질러보았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내지를 빠르게 훑다 141페이지에서 멈췄다. 책을 바닥에 놓고 손전등을 내리자 잠식된 문장들이 빛의 가위가 되었다. 그것은 어둠을 자른다. 공간이 물리적으로 밝아지진 않았지만 어둠은 사각사각 밀려가고 있었다.

내일은 142페이지, 다음은 143페이지를, 그다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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