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금주

by 이은수

- 어떤 악의로도 훼손되지 못할 기억이었다.

이유리의 단편 소설 <비눗방울 퐁> 중 '담금주의 맛'에 나온 구절이다.

연인과 헤어지면 내 세상에 없던 개자식이 하나 탄생하곤 한다. 마음껏 울며 씹고 분노하고, 그러다 보면 그 개자식을 향한 나의 화는 조금씩 누그러진다. 날카로운 술의 맛이 과일과 함께 깊이 우러나, 다디달고 부드러워지는 때가 오듯이.

그런 맛이 남는 순간이 오듯, 그런 장면이 남는 때가 오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마실 수 있는 날이 올 때쯤이면, 나는 이미 아무렇지 않은 사람이 된 걸 지도.

숨소리를 나누며 잠든 날들, 오롯하고 소중했던 순간들. 그런 순간들은 어떤 악의로도 훼손되지 못한다. 그때쯤이면 좋은 기억은 좋은 칸에 분류해 둘 줄 알게 된다. 담금주는 이미 우러났고, 나는 그걸 마실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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