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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수 Dec 02. 2023

휴지

1분 소설

선은 마트에 들러 휴지들이 모여있는 코너에 갔다. 그리고 100% 천연 펄프라고 쓰인 휴지 한 묶음을 계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작은 원룸에서 고슴도치와 함께 산다. 이름은 초코이다. 초코는 리빙박스 안에서 쳇바퀴를 돌고 있었다. 쳇바퀴를 돌고, 사료와 밀웜을 먹고, 용변을 보는 것이 초코의 운명인 것이다. 초코뿐만 아니라 각각의 휴지들에게도 운명이 정해져 있다. 선은 비염이 심해서 새로 사 온 휴지묶음에서 휴지 1을 꺼내어 썼다. 남은 휴지들이 아쉬운 작별 인사를 건넸다.

- 잘 가


휴지 1은 선에 의해서 풀어헤쳐졌다. 선은 평소에도 휴지를 많이 사용하는 편에 속한다. 더는 보다 못한 휴지 2가 힘껏 삿대질을 하며 소리친다.

- 그렇게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그러나 휴지 2의 목소리는 선에게 '쉭쉭'따위에 그쳤고, 힘껏 손을 뻗은 삿대질은 '나풀나풀'거림으로 보였을 뿐이다. 휴지는 그저 휴지일 뿐이니까.

- 인간은 원래 인간 말만 들어. 자기보다 하등 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에 상처는 관심이 없다고.

휴지 3이 말했다.

- 인간들끼리도 마찬가지야. 마치, 인간세계라고 총칭하지 못할 만큼 그들의 세계에는 사이사이에 벽이 많아.

휴지 4가 말했다.


몇 시간이 흐른 뒤 선은 휴지 2를 꺼내어서 화장실 휴지걸이에 걸었다.

- 나도 갈게.

휴지 2의 목소리는 왠지 슬퍼 보였다. 화장실로 끌려가는 휴지 2를 보며 휴지 1은 안도했다. 저곳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휴지 2는 춥고 습한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렸다. 선이 그때 화장실을 잠깐 들어왔고, 울고 있는 휴지 2를 봤다.

- 어, 젖었다. 젖은 칸은 떼어야겠네.

그렇게 휴지 2는 한 칸 얇아졌다.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나는 휴지로 태어났고 아무리 소리쳐도, 눈물을 흘려도 휴지일 뿐이라고. 인간 중 그 누구도 휴지가 운다고 위로해주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인간은 단 한 번도 휴지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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