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호자다
어느 금요일 저녁,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아들이 불쑥 말을 꺼냈다.
"아빠, 나 내일 할머니네 집에서 자고 올까 봐."
"내일? 몇 시에?"
"아빠가 일찍 데려다줘. 하루 자고 오게."
녀석은 벌써 3년째, 한 달에 한 번 이상 할머니 댁으로 향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짐을 챙긴다.
"내가 가야 할머니가 안 심심해해"
녀석의 작은 가방 안에는 시간을 보낼 보드 게임과 함께, 치매 할머니와 놀아줘야 한다는 묵직한 책임감이 들어있다. 아들은 그렇게 할머니를 통해 '어른의 마음'을 배워가는 중이다.
재미있는 건 엄마의 반응이다.
엄마에게 손자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지금까지도 그저 물가에 내놓은 '애기'일뿐이다. 치매라는 안개가 엄마의 기억을 가끔 가리지만,
"그래도 내가 어른인데 애를 돌봐야지."
본능적인 책임감만큼은 안개 너머에서 또렷하게 빛난다.
아들은 할머니 댁에 도착하자마자 발코니부터 살핀다. 에어컨 실외기실 문이 열려 찬바람이 들어오진 않는지, 발코니 창문 단속은 잘 되었는지 확인한다. 주방에 가서 상온에 방치된 음식은 없는지 체크하는 모습은 흡사 능숙한 보호자의 뒷모습이다.
반면 엄마는 손자를 챙겨야 한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기분 좋은 긴장감을 유지한다. 평소엔 본인 약 챙겨 먹는 것도 잊으면서, 간혹 두통에 시달리는 손자를 위해 미리 약국에 가서 비상약을 사다 둔다.
언젠가 할머니 댁에서 자고 있던 아들에게 새벽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아빠, 머리가 계속 아파. 몸도 으스스하고..."
자다 깬 아내와 상의했다. 겨울 새벽에 아이를 데려오는 게 오히려 몸 상태를 해칠까 걱정이었다.
그때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 예전에 애기 왔을 때 사다 둔 해열제가 있을 텐데. 내가 한번 찾아볼까?"
"어머니, 그런 게 있어요? 네, 한번 찾아봐 주세요."
"가만있어 보자... 그래, 여기 있네! 이거 먹이면 될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 했다. 화면 속에 찍힌 건 정확히 아내가 찾던 그 약이었다. 본인의 오늘 아침 메뉴는 잊어도, 손자가 아플 때 필요한 약의 위치는 잊지 않은 것이다. 아들은 할머니가 챙겨준 약을 먹고서야 비로소 편안히 잠들었다.
사실 부모님 세대와 손자 세대는 궁합이 가장 좋다.
서로에게 원하는 것이 단순하고 명료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복잡한 계산은 필요 없다.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치매 할머니가 같은 질문을 반복해도 손자는 짜증 내지 않는다.
"왜 그러시지?" 하는 깊은 근심도 없다.
그저 "이그, 할머니. 아까 얘기한 거잖아."라며 가벼운 핀잔을 던질 뿐이다.
반면 우리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엄마, 자꾸 헷갈려하니까 걱정돼요. 이건 꼭 기억하셔야 해요."라며 비장해진다.
아들의 반복되는 이야기에도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성심성의껏 반응한다.
손자가 백 번을 물어도 할머니는 타박하지 않는다. 그저 내 강아지가 말하는 것이 기특하고 신통방통할 뿐이다. 명절 내내 붙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할머니와 손자의 얼굴이 가장 행복해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스스로를 보호자로 믿는 두 사람.
이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관계를 보고 있으면 가슴 한구석이 찡해진다.
아들은 할머니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자존감을 얻고, 엄마는 손자의 '연약함'을 보살피며 삶의 활력과 존재 이유를 찾는다. 우리는 흔히 치매를 돌봄의 일방통행이라 생각하지만, 아이의 눈으로 본 할머니는 여전히 나를 지켜주는 든든한 나무이자 비밀을 공유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친구다.
문득 궁금해진다.
쑥쑥 커가는 저 아들이 언제까지 할머니와 소꿉놀이 같은 하룻밤을 보낼까?
아마 사춘기가 오고 자기만의 세상이 더 커지면 지금 같지는 않겠지.
하지만 분명한 건 하나 있다.
아들이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치매 할머니와 보낸 이 '수상한 공조'의 시간들이 녀석의 마음속에 가장 따뜻한 뿌리가 되어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일요일 오후인 지금.
아들을 데리러 갈 채비를 해야 한다.
지금도 두 사람은 서로의 우주를 지키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돌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