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시간 스타트업에 몸을 담았다. 조금 더 역동적이고 창의적인 바이브가 있는 환경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에 그런 회사는 도대체 어디 있을까? 두리번거리다 핫하다는 스타텁에 이르렀다. 약 30명 정도 되는 스타트업에 피플앤컬처팀의 팀장으로 착륙했다. 의욕이 분기 탱천했다.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할 수 있는 것도 많아 보였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한눈에 보이니 좋았다. 가까운 곳에서 보고 듣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 무얼 해야 하는지 더 잘 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들은 먼지가 가득 쌓인 책상과 짐들이었다. 아무도 치우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물어보니 1년이 넘게 닦고 쓸지 않았다고 한다. 난 이것이 이 회사의 현황을 설명해 주는 단적인 예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했다. 어영부영 출근하여 어영부영 퇴근했다. 일은 하되, 일만 하는 것 같았다. 조직은 일'만' 하는 곳이 아니다. 일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일만 해서는 안 된다. 일 외의 공백이 많기에 이것은 사람들이 연결해주어야 한다. 가령, 오다가다 잡담을 나누고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줍고 싱크대가 더러우면 닦고 냉장고에 썩은 음식들이 있으면 누구든 나서서 해결하고, 쓰레기통이 흘러넘치면 정리하는 것 등이다.
왜 그런 걸 해야 하느냐?라고 물을 수 있지만 물어선 안 된다. 조직은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곳이지만 일만 해선 안 되는 곳이다. 조직은 일이 있기 전에 사람이 있다.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곳이기에 이런 기본적인 것들을 모른 척 해선 안된다. 이런 기본적인 것은 모른 척하고 회사 욕을 하고 불만부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조직을 망치는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의 첫 번째 미션은 청소와 정리였다. 쓸고 닦고 정리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쓸고 닦고 정리한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부탁했다. 앞으로 우리만의 규칙을 정해서 우리의 공간을 아끼자고 당부했다. 그렇게 약 2주간 사무실 청소만 했다. 알고 보니 사무실 청소하는 업체가 있었는데 아무도 확인하는 사람이 없었다. 업체가 언제 어떻게 청소를 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담당자가 퇴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납득되지 않는 것이 많았다. 하나하나 확인하여 일단 너의 사무실을 '우리의 사무실'로 바꾸려고 했다. 이런 나의 노력에 대표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게 과연 본질일까요?" 그건 지켜볼 일이었다.
그렇게 약 1달간의 환경 미화를 끝내고 나니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일회용 커피컵을 1미터 이상 쌓아 놓고 전시해 놓던 사람이 자신의 책상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사무실에 떨어진 쓰레기를 줍기 시작했다. 싱크대의 배수구를 청소하기도 했고, 냉장고에 있는 음식 중 오랫동안 주인 없는 것들은 자기들끼리 얘기하며 버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주인 없는 공간을 '우리의 공간'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환경 미화가 끝나고 두 번째 미션은 우리의 정신 청소 및 정리였다. 정신을 청소하고 정리한다고? 이 회사 사무실에서 1년 동안 정리 되지 않는 책상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구성원은 정리되지 않은 책상처럼 이 회사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즉, 이 회사를 왜 다니는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하고 싶은지, 어떻게 이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지 등에 대한 생각이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정리되지 않은 외부 환경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 회사의 90% 이상의 사람들이 1년 3개월 이내에 퇴사하였다. 이 회사를 다녀야 하는 이유가 없어서인지, 회사에서의 비전이 없어서인지 구성원의 90% 이상은 1년이 조금 지나면 퇴사를 하는 것이 공식이었다.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 회사를 왜 다니고 있는지, 왜 다녀야 하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까 고민을 했다. 일단 그들과 대화를 해야 했다. 집단을 대상으로 대화를 꺼낼 때는 반드시 대화 프레임이 설계되어야 한다. 대화 프레임이란, 대화의 목표, 목표 달성을 위한 프로세스 등을 말한다. 이러한 프레임 없이 집단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좋지 않다. '신뢰'라는 점수를 까먹기 딱 좋기 때문이다. 특히 나와 같이 피플앤컬처팀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그들과 섣불리 대화하는 것은 앞으로 내가 하는 일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기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구성원들과의 대화 프레임을 짜기 전에 꼭 해야 할 것이 있다. 경영자의 생각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경영자는 이 회사가 갈 방향키를 쥐고 있는 사람이다. 방향키를 쥐고 있는 사람이 가장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 움직임의 시작은 내 생각을 먼저 말하는 것이다. 구성원들과 대화를 할 때 리더의 생각이 빠지면 배는 표류할 수밖에 없다. 리더가 가리키는 방향이 좋으냐 나쁘냐는 중요치 않다. 일단 명확한 방향이 있어야 어디든 움직일 수 있고, 움직여야 그곳이 우리가 원하는 곳인지 아닌지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대표와 이야기를 해야 했다. 문제가 감지되었다. 대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명확하지 않았다. 당황스럽기는 질문한 나뿐만이 아니라 대표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회사의 내외부 환경이 정리되지 않은 이유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대표가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서 방향성이 없어 보이는 것인지, 정말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현재 상황에서 가늠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대표의 생각이 더욱 모호해졌다.
더 이상 물어본다고 답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대표의 기분만 나빠질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방향을 다방면으로 펼쳐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구성원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현재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지"
어떤 이들에겐 깜짝 놀랄 만큼 통찰이 담긴 답변이 나왔다. 구성원들의 답변을 모두 모아서 정리하여 대표와 나누었다. 여기서 대표의 역할은 본인의 생각을 곁들여 정확하고 명확한 방향성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표의 반응이 의외였다. 대표는 대뜸 '비즈니스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단언했다. 뜨악했다. 심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대화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비즈니스의 히스토리를 무시하고 그냥 본인만의 생각이라는 생각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다시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이 회사에 전략을 다루는 C레벨이 한 명 있었다. 이 분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회사에 대해 모르지만 이 분에게 회사의 대략적인 방향 설정의 중요성과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당장 방향을 설정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세요. 우리 회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그것을 위해 앞으로 3년 안에 보고자 하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황당한 질문이다. 이럴 때 나 같은 기술자가 필요하다. OKR이라는 도구가 있다. Objective & Key Result의 줄임말이다. IBM과 구글에서 써서 유명해진 성과 관리 도구이다. 이 도구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이 도구의 핵심이 방향을 설정하고(목표 설정), 이를 일상에서 관리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대표 또한 이 도구를 알고 있었고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부랴부랴 OKR 셋업을 준비했다. 위에 말했던 CSO에게 OKR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하고, 전사 OKR을 도출하도록 했다. CSO도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평소 생각하던 바를 토대로 전사 OKR을 수립하였다. 수립된 OKR을 가지고 대표와 논의했다. 대표도 이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 분위기였다. 전사 타운홀을 통해 OKR 도입을 공포했다. 사람들은 나름 반기는 분위기이다. 무엇보다 본인의 성장을 위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 도입은 신중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제도도 그것을 어떻게 입히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의 핵심은 '구성원의 수용도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수용도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3가지가 있다.
1. 구성원에게 제도의 필요성을 이해시켜야 한다.
2. 제도 실행을 위한 구체적 액션 플랜을 명확하고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3. 실생활에서 제도의 궁극적 이점을 알려 주어야 한다.
위 3가지 조건은 필수 조건이라 빠지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진다.
위 3가지 필수 조건을 염두하고 OKR을 실시하였다. 성공을 위한 구체적 전술 또한 필요하다. 이는 다음에 이야기하겠다. 그렇게 OKR 도입을 위한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 이제는 실행을 성공시키는 일에만 전념해야 했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대표가 모든 프로젝트 중단을 선언했다. 상황은 이러했다.
OKR 시행이 막 진행되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대표가 나를 불렀다. 영업팀과 티타임을 하는 데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무슨 이슈가 있는지도 모른 채 티타임에 참석했다. 티타임을 시작하는 대표의 첫마디에 나는 경악했다.
"너네 팀에 정치질하는 인간 하나 있지?"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난 여태 그 대표가 그런 인간인지 몰랐다. 사람이 그리 나이스하고 경쾌한 맛은 없다고 느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무식하고 무례하다고 느꼈다. 저 말을 시작으로 약 2시간에 걸쳐 영업팀 내 정치질하는 인간 색출 작업이 진행되었다. 나는 구성원들의 경험을 개선하는 의무와 책임이 있는 직무 담당자로서 모욕감을 느꼈다. 영업팀 내 어떤 심각한 문제가 있다손 쳐도 이런 방법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거니와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가 빨리 마무리되었으면 했다. 그렇게 약 2시간 동안의 경험은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과 더불어 어떤 확신이 들게 하였다.
그날 하루 종일 그 시간에 들었던 말들과 느낌이 떠나질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이 많이 되었다. 그렇게 그 하루가 지났다. 자정을 넘긴 새벽 나는 도저히 잠이 오질 않아 대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요지는 이러했다.
"오늘 한 대화에서 대표의 행동은 너무나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런 식의 대화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는 다른 방법을 부탁드려도 되겠는가"
이 메시지를 받은 대표는 난리가 났다. 나를 적으로 선포했다. 모든 프로젝트가 급기야 중단되기에 이르렀다.
내가 잘못한 것일까?
난 조금 더 신중했어야 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더욱 신중한 방법이었을까?
내가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었을까?
후회가 되었다. 나 또한 세심하게 접근하지 못했던 것은 자명했다. 내가 대표에게 걸었던 기대는 둘째치고 그 사람도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었기에 나 또한 조금 다르게 접근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러나 일은 벌어졌다. 이후 그 간극을 메우기가 힘들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땐 대표도 나도 어느 정도 대화가 진행되었다. 서로가 생각한 바를 이야기했고, 나름 나의 행동을 사과했다. 사과를 할 때 이게 내가 사과할 일인가라는 의문이 가시질 않았지만 그렇게 해야만 내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과하는 척했다.
역시 진심이 없는 사과임을 본인도 느꼈는지 약빨이 먹히지 않았다. 이후 사건이 봉합되는 듯하더니 점점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 사이의 간극이 더욱 크고 깊게 벌어졌다. 나중에는 너무나 커져 어느 누구도 봉합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골든 타임을 놓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이직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이직 준비를 하는 나를 알아차린 대표와는 더욱 멀어졌다. 그리곤 지난 2월 28일 약 9개월 간의 동행을 마무리했다. 지금 돌아보면 아쉬운 점이 많다. 내가 당시에 할 수 있었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나의 생각에 갇혀 마음을 내지 않았다. 나 또한 상황을 바꾸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상황을 바꾸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않았다. 그때 상황을 바꾸었더라도 그 대표와 오랜 기간 동행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퇴사라는 마침표를 찍는 결론에 이르렀다.
많은 걸 느끼고 배웠다. 대표를 원망하고자 쓴 글은 아니다. 이 글을 보고 누군가는 나의 문제를 더 많이 그리고 크게 지적할 것이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성격의 그것도 아니다. 그냥 덤덤히 지난날 나의 경험을 돌아보고 싶었다. 그리고 털어 버리고 싶었다. 속시원히 털어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것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가장 긍정적 액션이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적고 나니 속이 시원하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 정도만 적어도 이렇게 홀가분할 줄이야. 이렇게 털어버렸으니 이제 정말 끝내자. 그리고 다시 시작하자. 지난 9개월을 딛고 일어나 바로 서고 싶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