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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가장의 슬기로운 백수 생활

by 진사이드Jinside

2023년 2월 28일부로 다시 백수가 되었다. 2013년 비교적 늦은 나이에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2015년 2월, 당시 다니던 회사의 계약이 끝나서 약 3개월이 첫 백수의 시작이었다. 결혼 2년 차이자 5개월 된 딸아이의 아빠였다. 가장의 백수는 달라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당시 저녁마다 술을 한 잔 했고, 늦은 아침을 시작했다. 당시 아내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잔소리 한마디 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님 내가 둔해서 그것이 잔소리인 줄 몰랐을 수도 있겠다. 그렇게 가장으로서 첫 백수 생활 3개월 이후 다음 회사를 만났다.


그 회사에서 4년을 꽉꽉 채우고 퇴사를 했다. 퇴사를 한 이유는 이직이 아닌 창업이었다. 창업이란 단어는 좀 거창하고, 1인 기업이 조금 더 맞겠다. 그렇게 혼자서 일을 시작했다. 약 6개월 정도 정말 재밌게 일을 했다. 아무 생각도 준비도 없었다. 그냥 뭔가 새로운 도전 자체가 즐거웠는지 정신없이 약 6개월이 지나갔다. 준비가 없어서인지 약빨이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니 열정도 시들시들해졌고, 앞으로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준비란, 내가 이 일을 왜 하는지를 명확히 하고, 이 '왜'를 바탕으로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무슨 가치를 전할지에 대한 개념은 완성되어있어야 했다. 그런 것 없이 그냥 되는 대로 일을 했다.


어정쩡한 서비스를 만들어 어정쩡한 방법으로 어정쩡한 고객들에게 알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래가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기본이 없으니 작은 일에도 쉽게 흔들렸다. 당시 내가 쓰던 닉네임이 상표권에 걸렸다. 내게 어느 날 이메일이 와서 상표권을 위반했으니 한 번만 더 쓰면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경고를 했다. 너무 어설펐다. 그렇게 내가 약 6개월 정도 만들어 놓은 브랜딩 이미지가 한 방에 날아갔다. 닉네임을 바꾸고 활동을 해보려고 했지만 모래성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그렇게 다시 백수로 돌아갔다.


약 1.5개월의 백수 생활을 끝내고 회사로 돌아갔다. 돌아간 회사 생활은 즐거웠다. 몇몇 눈에 띄는 인간들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즐거웠다. 몇 번의 이직을 경험한 아내는 이후 줄곧 하는 말이 있었다. "오빠, 환승은 얼마든지 가능한데, 하차는 안돼!" 나 또한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했기에, 다음 행선지는 공백 없이 환승에 성공하였다.


이번 2월 28일 퇴사는 환승이 아닌 하차다. '하차가 아닌 환승'이라는 원칙을 지키려 하였으나 참으로 희한한 일이 벌어지면서 지키지 못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최종 합격 소식까지 받고 최종 레터를 기다리는 상황에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채용 중단 소식을 알려 왔다. 비즈니스 사정을 들먹이면서 말이다. 이 일로 난 졸지에 아내와 약속을 어기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2주가 지났다.


백수 생활을 제법 해보았지만, 이번 백수 생활에 대한 감회는 이전과 약간 다르다. 불안하거나 조바심이 나는 것은 매한가지다. 다만, 이번 백수 생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좁은 빈 구석에 처박혀 있는 '여유'라는 것을 옆에 두려고 한다. 꽉 잡고 두 번 다시 놓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느샌가 이 놈은 온데간데없다. 그리고 내 앞엔 '불안'이라는 놈이 떡 하고 서있을 때를 여러 번 경험했다.


이번 백수 생활은 조금 다르게 살아보고 싶다. 내가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내가 계획하지 않았던 사건이 벌어졌다. '불안' 앞에 조금 더 초연해지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스토리는 거의 완벽하다. '최종 합격 소식까지 전해 듣고 채용이 중단되었다'라는 초유의 사태 앞에 내가 얼마나 초연함을 유지하며 다음 행선지를 이에 영향받지 않고 진행할 수 있는지 등을 실험해 보고 싶다. 누구나 상황이 좋을 때는 여유가 넘친다. 그러나 진짜는 상황이 정말 X 같을 때 그 진가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까지 든다.

나의 깊이와 넓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백수 생활 원칙 9개를 정했다.


1. '불안'에 10초 이상 잠식 당하지 않기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 내기

3. 내게 주어진 소중한 평일 오후를 즐기기

4. 가족들에게 조금의 불안감도 드러내 보이지 않기

5. 핑계 대고 하지 못했던 일들 닥치는 대로 해보기

6.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고 장소 가보기

7. 하던 대로 규칙적인 생활 하기

8. 이미 그러한 듯 살기

9. 무엇이든 성공하면 가족에게 소고기 사주기



이렇게 적고 나니 설렌다? 슬기롭게 백수 생활을 하는 건 좋은 데 설레는 건 오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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