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그리고 우리의 삶
이 질문은 내가 멋있어 보이려고 던진 질문이 아니라, [이방인]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가 던진 질문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이방인]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오늘인지 어제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엄마는 죽었다. 알베르 카뮈는 인류라는 존재를 매우 자연과학적으로 접근한다. 지구에서는 대자연 나아가 우주의 관점에서 인류라는 존재는 하찮다. 아니 하찮다는 표현도 맞지 않다. 최소한 등급이 있다는 말인데 등급조차 없다. 생물이긴 하나 무생물에 가깝다. 피와 눈물은 있지만 그 피와 눈물엔 아무 의미가 없다.
자연엔 생과 죽음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자연은 무미건조하다. 적어도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무미건조하단 말에는 이미 가치가 결합되어 있으니 이 또한 위의 '하찮다'는 표현과 비슷하게 적절치 않다. 자연은 말 그대로 그냥 그러하다. 자연에서의 생과 죽음, 만남과 이별은 그냥 일어난다. 어떤 의미도 없이 그냥 일어나는 현상이다.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카뮈는 이러한 사실을 부조리라 정의했다. 자연의 일부인 인류는 대자연의 법칙에 귀속된다. 대자연의 법칙대로라면 인류에게도 생과 죽음, 이별과 만남은 그냥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사실에 불과하다. 카뮈는 이러한 사실에 대한 통찰을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이러한 사실 앞에 인류는 단지 생존 외에는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럼 우리는 단지 생존하기 위해 사는가? 즉, 살기 위해 사는 것인가? 인간의 생존은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다르기에 인류는 이러한 문명을 이루고 살고 있는가? 힌트는 이 질문에 있다.
우리는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
당신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가? 혹시 현재 살고 있는 인구 중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아마 저 질문에 답하기 위해 사는지도 모르겠다. 카뮈는 [시지프의 신화]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하루를 살아내는 인류가 가진 난제를 표현했다. 끝없이 언덕 위로 돌을 굴리는 시지프와 인류는 비슷하다는 것이다. 카뮈는 이러한 인류가 가진 난제를 풀기 위한 세 가지 해법을 제시한다.
자살하여 모든 것을 종식시키거나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거나
무한 반복성에 반항하거나
자살하면 끝이 나지만 우리는 결국 답을 알지 못했고, 희망을 가지고 사는 것은 종교나 마약과 같이 환상에 내 인생을 거는 것이다. 카뮈는 이에 마지막 반항하는 삶을 선택한다. 어떻게든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의미는 결국 본인이 발견하고 창조하는 것이다. 의미 없어 보이는 인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발버둥이 바로 반항하는 삶이다. 반항하는 삶이야 말로 날 것의 삶, 야생의 삶이 아닌가.
우리는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왜 죽지 않고 살아야 하는가?
죽을 때까지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을 어떻게 극복 또는 승화시킬 것인가?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
무한히 반복되는 오늘의 삶에 힌트가 있다. 무한히 반복된다고 똑같은 삶일 필요는 없다. 니체도 영원회귀를 말하면서도 전복의 삶을 살지 않았는가? 우리는 반복되는 와중에서도 새로움을 발견하고 창조해야 한다. 내 삶이 죽음에 가로막혀 있다고 해서 멈추거나 위축될 필요도 없다. 죽음과 생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나는 죽음과 생 사이에서 나의 삶, 나의 의미를 발견하고 창조하면 될 일이다. 이러한 사실 앞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본인의 선택이다. 카뮈처럼 정면 승부 할 것인지, 자살하여 의미 없는 생을 마감할 것인지, 무언가 희망적일 것이라는 오아시스를 쫓으며 살 것인지.
자살은 회피하는 것이요 희망은 순응하는 것이다. 정면 승부의 삶은 멋져 보이나 고달프고 외로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삶은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나는 죽어도 Go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