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면 두려움을 먹고사는 사람들과 두려움을 넘어 사랑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다. 생존이라는 일생일대의 과제를 해결하는 것에만 급급한 사람과 생존을 넘어 인간의 궁극의 가치 실현을 지향하는 사람들.
생존에 급급한 사람들은 당장 눈앞의 일만 보인다. 현재 내게 닥친 상황이 혹시나 나를 죽이지는 않을까 걱정한다. 그들은 착각한다. 교통사고 등을 제외하고 지금 당장 어떠한 일도 그들을 물리적으로 죽일 수 있는 것은 현대엔 거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두려움을 쉼 없이 느낀다. 정확히 말하면 느끼고 싶어 한다.
저 사람이 날 떠나지 않을까
내가 외톨이가 되지 않을까
내가 nobody가 되지 않을까
내가 외롭진 않을까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죽진 않을까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 안의 실체 없는 두려움을 불러 낸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동력이 되어 '열심히' 산다.
열심히 살아야만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두려움을 끊임없이 스스로 생산, 재생산한다. 그렇기에 마음은 항상 불안하다.
저 사람이 내 것을 뺏아가지 않을까
내가 잊히지 않을까 내가 가진 것이 없어지면...
내 아이가, 내 자식이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느끼며 살진 않을까
그렇게 더 큰 두려움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며 더 '열심히' 살며 자신을 외부의 무언가에 입증하며 산다.
두렵기에 멈출 수 없다. 멈추면 나의 불안이 현실이 될까 더욱 두렵기 때문이다. 멈춰서 쉴 줄 모른다. 목 없는 말처럼 드 넓은 황야에서 이리저리 엉덩이를 들썩이며 저리 뛰었다 이리 뛰었다 쉼 없이 뛰지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 필요가 없다. 이들이 원하는 것은 그냥 쉼 없이 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뜀으로써 자신 안에 무한히 생겨나는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질주는 그들을 더욱 두렵게 만들 뿐이다.
두려움이 아닌 사랑을 먹고사는 두 번째 부류가 있다. 이들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두려움을 포기한 사람들이다. 두려움 없는 사람은 없다. 두려움이 자신의 삶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두려움을 이해하고 더 이상 두려움에 사로 잡혀 살지 않겠다고 선택한 것이다.
그들 또한 내가 외톨이가 되지 않을까, 내가 nobody가 되지 않을까, 내가 외롭진 않을까,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 죽진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들의 다른 점은 그것은 단지 내 마음 안에 있는 두려움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들은 두려움에 갇혀서 끄달려 다니는 삶을 포기했다. 그 대신 더 큰 삶을 선택했다. 두려움에 갇혀서 한 발자국도 옴짝달싹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더 이상 두려움이라는 허상에 갇혀 바늘구멍만 한 삶을 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선택한 것이다.
그들 또한 두렵지만 두려울 때마다 대신 용기를 낸다. 아 진짜 X 됐네 하는 순간, 그들은 도망가거나 회피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는다. 그 사건이 벌어졌음을 인정하고, 그 사건으로 인해 내 마음에 두려움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는 것을 또는 덮친다는 것을 인정한다.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대신 두려움을 끌어안는다.
그 두려움도 내 것이자 나의 일면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 또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받아들인 두려움은 이상하게 사라진다. 그들은 두려움을 없앤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소화시켜 버린 것이다. 두려움이 본래 나와 하나라는 것을 알기에 두려움을 대상화하여 떨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희망과 긍정을 말한다. 상황 자체를 좋다, 나쁘다로 단순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그리고 좋다고 해서 좋아하지 않고 나쁘다고 해서 싫어하지 않는다.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좋다는 것, 나쁘다는 것이 단순히 자신의 해석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상황에 자유롭다.
마음이 바쁘지 않다.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해야 나에게 유리하게 만들 수 있을까, 나의 두려움을 피하거나 감출 수 있을까 생각하는 전자의 사람과 달리 이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두려움을 더 깊게 이해하고 두려움이라는 장벽을 한 꺼풀 더 벗겨내 성장할까를 고민하고 행동한다. 이 상황을 통해 내가 성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은 혹시 없는지,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에 집중한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껴안고 거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들은 다르다. 이들은 마음이 그리 요동 치진 않지만 요동이 쳐도 그 요동친 마음은 금방 사라진다. 그 마음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허상에 휘둘려 다니지 않겠다고 선택하였기에 거기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이들에겐 외부의 기준이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외부의 무언가가 자신을 채워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전자의 사람들은 생존과 두려움에 갇혀 있고, 후자의 사람들은 창조와 사랑으로 자유롭다.
전자의 사람들은 피하고 숨기며 살고, 후자의 사람들은 드러내고 인정하며 산다.
전자의 사람들은 내 눈의 들보 사이로 남 눈의 티끌만 보며 살고, 후자의 사람들은 자신을 먼저 돌아본다.
전자의 사람들은 어쩌다 한 번씩 행복하고, 후자의 사람들은 어쩌다 한 번씩 더더 행복하다.
나는 두려움과 사랑 사이에 경계선이 있다면 사랑으로 한 발자국 넘어왔다. 대부분의 삶을 두려움과 살았기에 사랑보다 두려움을 더 잘 안다.
둘 모두를 먹어 보았기에 무엇이 더 나를 나답게 하는지도 안다. 먹는 것이 자신을 만들며, 곧 나 자신이라는 것도 안다.
두려움을 먹을 것인지 사랑을 먹을 것인지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
빨간 알약인가? 파란 알약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