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나는 뭔가?

도대체 난 누구인가

by 대충철저

어렸을 적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그런데 눈을 뜨고 본 세상이 낯설었다. 매일 잠을 자고 눈을 뜨는 곳인데, 처음 본 듯 낯설었다. 낯선 곳을 얼른 눈에라도 익혀야 할 것 같아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혹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난 이런 경험을 자주 했다.


당시 이런 경험이 신기하여 부모에게 물어본 기억이 난다. 대답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답과 상관없이 이런 경험을 자주 했다. 그 경험 뒤에 꼭 따라오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지금 여기 말고 다른 곳에서 다른 존재로 살아본 적은 없을까? 내가 여기 꼭 있는, 또는 있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그 나이에 던진 질문에 걸맞게 꽤 황당하다.


저 질문을 어른들에게 했는지 여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도 저런 질문에 답하고 싶은 욕구가 느닷없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살았다. 별로 유익한 질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살아오다 우연한 기회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때는 군대를 전역하고 만 2년여 정도 되었을 때이다. 군대를 전역하고 그 해 나는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해외로 연수를 갔다. 영어 공부를 한 이유는 두 가지. 할 것이 없었고,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할 수 있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영어 공부였기에 영어 공부를 시작했고, 인연이 되어 해외까지 나가게 되었다. 해외에서 열심히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는 영어 공부를 해야 하는 '외부 환경'과 영어 공부를 해야 한다고 믿는 '나'가 있었다. 그렇게 외부와 내부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주었다. 당시의 나는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 정도로 답할 수 있을까. 돌아보면 그 답 이외엔 딱히 답할 수 있는 답도 없었다.


그렇게 약 4개월 정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그러다 여자를 만났다. 여자를 본 순간 한눈에 반했다. '여자'라는 외부 상황과 '그 여자에게 한눈에 반해 버린 나'가 만난 것이다. 당시 내부가 외부에 반응하지 않았거나, 외부가 내부에 응답하지 않았다면, 외부와 내부는 독립적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즉,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내부(나)는 외부(여자)에 반응했다. 여기서 외부(여자)가 내부(나)에 응답을 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나와 너'가 탄생하는 것이다. 당시 나는 우연히 본 '여자'라는 외부 상황에 반응하였고, 또한 우연히 그 여자라는 '외부 상황'은 또 다른 외부 상황, 즉 본인을 보고 한눈에 반해 버린 '나'에게 반응하였다. 그렇게 나는 '사랑에 빠진 나'로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


그렇게 한 동안은 '사랑에 빠진 나'로 살았다. 물질이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고전 물리학의 법칙과 같이 나 또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은 없어지고 오직 '사랑에 빠진 나'만 남게 되었다. 이런 생활을 몇 번 거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랑에 빠진'이라는 상태가 없다면, 그때의 나는 누구인가?


아무 행위도, 감정도, 생각도 없다면, 그때의 나는 누구라 정의할 것 인가? 그런 나는 분명히 있다. 그럼 그때의 나는 누구라 할 수 있지?라는 물음이 생겼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나'가 나라고 할 수는 없을까? 그럼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 또한 부처님 말씀처럼 매 순간 변하는 존재인가? 내가 매 순간 변하는 존재라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여기에 대한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엔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하는 데 있어 도움을 누구로부터 구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그렇게 하나의 질문 '나는 누구인가'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여러 가지 책을 읽었고, 여러 말씀을 듣기 시작했다. 한 가지 분명히 해둘 것이 있다. 당시 어렸던 나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불안과 두려움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나'라는 불확실성에서 완전히 해방되어, 나는 ㅇㅇ이라고 정의 내리고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하나 더, 나는 어떤 신비주의를 기대하기도 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면, 소위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을 줄 알았다. 나는 그렇게 어찌 보면 당시의 수준에 맞게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았을까? 찾았다. 나는 위의 말처럼 끊임없이 변한다. 변하는 '나'가 있고, 그 변함 이전의 '나' 또한 존재한다. 그러니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하며, 이 두 가지의 '나' 모두 '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위에 내가 기대한 바처럼 나는 ㅇㅇㅇ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확정하려면 불변하는 존재가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여태 발견한 불변하는 존재는 이 모든 작용을 알고 있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 밖에 없다. 이것을 나는 무어라 불러야 할지 또는 정의 내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실밖에 알지 못한다. 그럼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존재를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글을 쓰다 보니 질문이 바뀌었다.


이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존재는 무엇인가? 그것이 '나'인가? 그럼 '알아차림' 자체가 나란 말인가? 도대체 알아차림은 또 무엇인가? 그럼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 나'와 '사랑에 빠진 나'는 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럼 나는 이렇게 당시에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보며 사는 존재인가? 그럼 그 '현상'은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가령 부자로서의 삶이라는 '현상'을 만들어 내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이 현상이라면 그 또한 언젠간 없어지는 것 아닌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개소리하고 있네!라고 말해도 할 말이 없다. 살아가는데 하등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 같은 개소리처럼 보이긴 하다. 그럼 이런 질문들은 진짜 개소리일까... 앞으로 나를 찾아가는 여정 위에서 이런 질문에 대한 탐구도 해보고 싶다. 진정한 '나'를 묻고 알아가는 여정이 이런 질문 한번 안 해보고 죽는 것보다 의미 있어 보이긴 하다. 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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