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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성이 Sep 07. 2022

문과와 이과의 캠핑

저는 학창 시절, 문과와 이과를 선택하는 기로에서 친구들이 모두 이과를 선택하길래 이과를 선택했다 학년이 바뀌었을 때 다시 문과로 바꾼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제가 문과로 바꾸게 된 결정적 계기는 당시 국문과에 다니던 고등학교 선배의 


"이과를 선택하면 단지 돈을 벌 수 있지만, 문과를 선택하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


라는 젊은 국문학도의 패기 어린 말에 저도 모르게 문과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이과에서 문과를 선택한 저를 포함한 3명의 도전자를 개척시대의 '카우보이' 또는 '텍사스'로 불렀습니다. 심지어 선생님께서도 '이 반에 텍사스 있나?'라고 질문을 하시기도 했었죠.


텍사스에서 소떼를 몰며 세상을 지배할 꿈을 품으며 이과를 개척하러 온 카우보이는... 현재 세상을 지배하기는커녕 돈을 좇는 부르주아도 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 문과 노비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그래도 후회는 없습니다. 그리고 믿습니다. 지금은 억눌려 있는 문과가 언젠가 세상을 지배하는, 특히 이과를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그래도 저희 아들은 훗날 이과를 갔으면 좋겠습니다.. 허허허


몇 년 전 겨울, 친구와 캠핑을 갔었을 때 일입니다. 이 친구는 청소년 시절 자본주의 노예의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비굴한 이과 출신입니다. 저보다 더 먼저 캠핑을 시작한 이 녀석은 장비를 차에 실을 때도 나름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으로 실었습니다. 저는 차에 있는 대로 장비를 쑤셔 넣는다면 녀석은 트렁크 앞에 쌓인 캠핑 장비를 쌓아놓고 머릿속으로 계산을 한 뒤 유레카를 외치며 목욕하다 알몸으로 뛰쳐나간 아르키메데스처럼 '그래 이거야!' 하는 표정으로 장비를 실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녀석의 계산처럼 되지 않았고, 몇 번을 넣었다 뺐다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노벨상을 받은 위대한 과학자가 하셨던 말씀인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데 너희 어머니 오늘 자주 오신다?"라고 말했고 녀석은 작은 소리로 "닥쳐, 미리 계산하고 실어야 최적화시킬 수 있단 말이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의 어머니와의 만남 이후 몸과 마음에 효심을 가득 채운 녀석은 마침내 짐을 모두 최적화시켰고, 우리는 예약한 연천의 캠핑장으로 출발했습니다. 


제설작업을 진행했던 고속도로에서 느끼지 못했는데, 톨게이트를 나와 캠핑장을 향하는 국도에서 세상을 뒤덮은 눈을 보고 감탄하며, 소설 설국의 첫 문장이 떠올라 말했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옆에 운전하던 녀석은 저를 보더니 "뭔 개소리야?"라고 합니다. 저는 개소리가 아니고 제가 조금 전에 말한 문장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설의 첫 문장이라고 했지만 녀석은 지금 눈 때문에 길이 미끄러워 불안 불안한데 개소리 좀 그만하라고 합니다. '무식한 이과 놈, 다양한 문장이 주는 글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0과 1만 아는 디지털이라는 단어로 포장한 단순 무식한 자식' 그렇게 저는 마음속으로 외쳤습니다. 


드디어 도착한 캠핑장도 눈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차가운 겨울 공기를 폐 속까지 깊게 마시며, 기지개를 켰고 영화 러브레터의 주인공처럼 두 손을 입으로 모으고 청순하게 "오겡끼 데스..." 순간 녀석이 소리쳤습니다. "하지 마 이 미친놈아! 지금 빨리 텐트 쳐야지 뭐하는 짓이야!" 그렇게 제가 세상에 내뱉은 오겡끼는 아쉽게도 제대로 기를 펴보지도 못하고 연천의 공기로 데스 하게 되었습니다. 


녀석은 파쇄석을 낮은 자세로 바라보더니 평탄화 작업이 제대로 안됐다면서 발로 툭툭 차고 다니며 파쇄석들을 고르게 합니다. 다시 낮은 자세로 바라보다 차로 달려가 뭔가 가져옵니다. 바로 수평계였습니다. 저런 게 차에 왜 있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대충 치면 되지 무슨 수평계까지 꺼내고 지 X이야!"라고 했고 녀석은 평탄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게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별 관심이 없어 그런지 제대로 듣지 않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단지 제 머릿속에는 눈사람을 2개 크게 만들어서 우리 텐트 앞에 장승처럼 세워놓고 싶다. 간절하게 세워놓고 싶다. 이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역시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이과생이다 보니 녀석은 신속하고 텐션을 주며 완벽히 텐트를 올렸고, 마무리 망치질 또한 그동안 제가 본 어느 누구보다 완벽했습니다. 그리고 주변 지형지물과 나뭇가지 그리고 돌로 완벽하게 방풍작업을 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이 자식은 이과를 넘어서 순수 그 자체의 자연인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녀석이 이번 캠핑을 위해 장만했다는 그 유명한 등유 난로를 꺼냈습니다. 보기만 해도 전신이 땀으로 범벅되는 끈적하고 화끈한 상상을 했습니다. "야! 빨리 등유 넣고 틀어봐 춥다.." 순간 녀석의 얼굴 표정이 '아차..' 하는 표정으로 바뀌었습니다. 전날 등유통에 등유를 가득 넣어서 준비했는데, 그걸 깜박하고 놓고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0과 1의 단순한 숫자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단순한 이과가 그러면 그랬지.. 하는 표정으로 녀석에게 말했습니다.


"너 영화로도 제작된 소설 <마션> 읽었냐?" 


"아니 안 읽었어. 지금 그 책 이야기가 왜 나와?"


"그 소설 첫 문장이 뭔지 알아?"


"몰라. 안 읽었다니까!"


"내가 알려줄게. 뭐냐면"


"아무래도 좆됐다. 그것이 내가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다. 나는 좆됐다."   (실제 소설에서 이렇습니다.)


그리고 제 머리를 향해 이소가스가 날아왔습니다. 퍽... 아이고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 그날 다행히 캠장님께서 등유통을 빌려주셔서 인근 주유소에서 등유를 구입해 얼어 죽지는 않았습니다.


_ 저녁에 고기를 먹으며 간단히 술 한잔 하는데, 건축학과에 정말 수지 같은 여학생이 수업받으러 오냐고 물어보니 "수지 같은 여학생도 없었고, 이제훈 같은 남학생도 없었어 그리고 제발 건축학개론 말 좀 하지 마." 라며 짜증을 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과에 여학생 1명밖에 없었다고 지난 추억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네요.

_ 그러고 보니 문과와 이과의 유일한 공통점을 찾았는데, 그것은 바로 고기를 좋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소고기 안심은 누구나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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