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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성이 Oct 13. 2022

캠핑장에서 들었던 사랑과 전쟁

포천에 있는 어느 캠핑장에 갔을 때 이야기입니다. 캠핑 다니기 딱~ 좋은 계절인 늦여름 어렵게 캠핑장을 예약하기는 했는데, 두 가족 사이트로 붙어 있는 대형 데크 중 절반을 예약한 거라 저희는 생판 모르는 남과 한 데크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캠핑장에 도착해 텐트 설치와 장비를 옮기는 것을 마칠 때까지 계속 옆 자리가 비길래 '설마 이렇게 자리가 비는 거야?"라며 자리도 넓게 사용할 수 있고, 저희 가족만의 방해받지 않는 캠핑을 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찰나 어떤 아가씨가 저희 텐트 근처에 오더니 "여긴가?" 하며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리고 휴대폰을 바라보며 데크 번호를 몇 번 확인하고 저희 텐트를 한 번 바라보더니 '어쩌지..' 하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초대형 데크 하나를 절반씩 나눠 사용하는 모습이라 아마 그 아가씨도 약간은 당황했던 것 같습니다. 뭐.. 저도 처음에 데크를 바라보며 그랬으니까요. 



잠시 후 도착한 그 아가씨의 일행은 3명이었는데 20대 후반에서 30대 초중반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녀들의 외모를 힐끔 살펴보며 대충 눈짐작으로 나이를 추정할 뿐 나이를 묻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들에게 '어이 아가씨들! 나이가 어떻게 되지? 이렇게 한 데크에서 보내게 되었는데, 통성명이라도 하지.."라고 하는 순간 저희 집 수호신의 강력한 스파이크가 제 등짝을 가격하고, 이마에 '애와 함께 있는데 여색을 밝히는 호색한' 또는 "여자만 보면 맥을 못 추는 껄떡쇠"라고 써 붙이겠지만요.



확실히 데크 하나 위에서 낯선 사람들과 생활하니 불편했습니다. 누구 하나 걷기라도 하면 데크 전체에 진동이 느껴졌고, 일상적인 목소리 크기로 대화를 해도 '저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구나' 하고 파악이 돼 자연스러운 대화 참여가 가능할 정도였습니다. 특히 그 아가씨 일행 중 한 명의 이름이 와이프와 같아서 제가 와이프의 이름을 부르거나, 그 여자분 일행들이 고귀한 그 이름을 부를 때면 모두 그쪽을 바라보기도 했었습니다. 이래서 이름이 흔하면 좋지 않은가 봅니다.



몇 가지 불편하기는 했지만, 캠핑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늦여름이지만 오후까지는 여름 날씨이기에 아들과 함께 수영장과 계곡을 오가며 신나게 놀았고, 저녁에는 역시 고기를 사이좋네 나눠 마시며 캠핑이 주는 행복을 만끽했습니다. 



이제 침묵의 서약을 맺고 합죽이가 되어야 할 매너 타임이 다가오면서 아이가 쉽게 잠들지 않으면 어쩌지 하고 살짝 걱정도 했지만, 온종일 신나게 뛰어논 아이는 "나는 이상하게 캠핑만 오면 잠이 안 오더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잠자리에 누운 지 3분도 되지 않아 잠들었습니다. 



하루 종일 아이를 따라다니느라 지친 저도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일찍 잠이 드려하는데, 옆 텐트의 아가씨들이 소곤거리는 말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모든 신경을 아가씨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들의 첫 번째 대화는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파악할 수 없는 베일에 싸인 의문의 남성인 정상무 또는 전상무가 알고 보니 희대의 카사노바라는 것인데, 혼자 사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미혼녀든 유부녀든 와인 한 잔 하자며 초대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반전은 정상무 또는 전상무가 알고 보니 바람을 피우다 걸려 이혼당한 전적이 있는 이혼남이고, 사내에서 여직원들을 유혹할 때 주로 쓰는 멘트가 바로 "**씨는 와인 좋아하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것은 유부녀를 유혹했다가 그 남편이 찾아와 난동을 부릴 뻔했으나 다행히 입구에서 경비원에게 제재된 적도 있고, 여자들 둘이 서로 정상무 하나를 두고 탕비실에서 OK 목장의 결투 보다 치열한 결투가 벌어진 적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정상무의 화려한 여성 편력과 각종 사건사고를 들으며, 어떻게 하면 와인을 좋아하며 혼자 오피스텔에 거주하는 나이가 지긋할 거라 예상되는 정상무가 가진 매력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외모가 엄청 잘 생겼거나, 매너가 엄청 좋거나, 여자들의 마음을 잘 읽는 능력이 있거나 였겠지만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그의 매력이 부럽기까지도 했습니다. 아.. 제가 정상무처럼 이 여자, 저 여자에게 난봉꾼처럼 군다는 것이 아니고 단 한 여자, 와이프의 마음을 100 퍼센트 빼앗고 싶은 마음에서 입니다!



그때 갑자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여직원 한 명이 작게 소리를 지르며 말했습니다. "와 소름!! 나 얼마 전에 정상무가 와인 좋아하냐고 물어봤었는데!" 그러자 나머지 두 명이 "그래서 어떻게 됐어? 설마 같이 와인 마신 거야?" 라며 물었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정상무와 와인을 마시지 않았고, 앞으로 정상무를 조심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대화의 주제는 이름까지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지만 타 부서의 어느 여직원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여직원은 사내 연애 중인데, 알고 보니 지금 연애 중인 직원 말고도 같은 회사의 다른 여직원 한 명까지 즉,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녀들은 양다리 중인 여직원에 대한 험담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성형한 전적이 있다, 남자관계가 원래 복잡했다, 빚을 내서 명품을 장만하고, 사귀는 남자들에게 명품 선물을 요구한다 등 여러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 양다리 걸친 남성들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저도 모르게 "X 년과 호구들이네.."라는 말을 작게 내뱉었습니다.



제가 글로 적어서 이렇게 단순하지 저 이야기를 주도하고 있는 한 여직원의 강약을 조절하며 듣는 사람에게 긴장감과 궁금증을 유발하는 흡입력과 사람을 집중하게 하는 기승전결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말솜씨는 엄청났습니다. 아마도 그녀는 전생에 탁월한 이야기꾼 헤밍웨이 또는 뛰어난 소설가이자 극작가였던 안톤 체호프였을 거라 생각이 듭니다. 



그때 한 여직원이 "그런데 우리 이제 시간이 많이 늦어서 자야 하지 않을까?" 라며 이야기를 했고, 저는 속으로 "더 해. 더 하란 말이야. 피곤하시면 박카스 섞은 아메리카노 커피라도 한 사발 드릴까요?.."라는 생각을 하며 그녀들의 이야기가 더 진행되길 바랬습니다. 



한 여직원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말과 잠시 텐트 밖으로 나갔고, 그때 다른 여직원 한 명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씨 (화장실 간 여직원) 근데 정상무 오피스텔 갔었을 거야." 그다음 말은 아이가 잠투정을 해서 몇 마디 듣지 못했는데, 아마 여러 정황상 정상무와 따로 단둘이 만남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던 다른 여직원이 "했네.. 했어.."라는 말을 했고, 저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말을 "했네. 했어.."를 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한 여직원이 파악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 캠핑장은 매너 타임이 철저하게 준수되는 절간 같은 분위기의 캠핑장이었고, 자신들의 텐트 속에서 대화하는 것이 우리 텐트에까지 들릴 정도였는데 화장실에 간 그녀가 텐트 근처에 온 것을 모른 채 정상무와 만났을 거라고 추측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을 화장실에 다녀온 여직원이 멈춰서 그녀들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한강 불꽃놀이, 정동진 해돋이만큼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세계 3대 구경 중의 하나인 싸움 구경을 들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은 목소리로 앙칼지게 서로를 향해 악담을 퍼붓는 여성들의 대화가 계속됐습니다. 잠시 후 어느 아주머니의 조용히 해달라는 말에 침낭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싸우기 시작했는지, 웅얼거리기는 하는데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습니다.



'조용히 나가 저 흔들리는 텐트 옆에서 4DX로 듣고 싶다.'라는 생각이 제 머리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밖에 나가서 그녀들의 텐트에 귀를 기울이며 있다 걸리면 개망신을 당할 거 같아 저는 여성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을 포기한 채 다음날의 캠핑을 위해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눈이 부어있는 듯한 외모와 모자를 꾹 눌러쓴 그녀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어젯밤 심상치 않은 일들이 그녀에게 있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머리는 쥐어뜯었을지 궁금해집니다. 



** 캠핑할 때 직접 들었을 때는 정말 재미있었는데, 막상 제가 글로 옮기니 재미가 없네요. 역시 생생한 대화를 글로 옮기는 것은 힘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전 09화 캠핑장에서는 금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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