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동경, 낯선 이해
나는 요즘
예전에는 불편했던 선택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결정이,
지금은
조금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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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두고 떠난 사람의 이야기는
늘 불편하다.
책 속에서조차
그 선택은 쉽게 미화되지 않는다.
남겨진 사람들의 고통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때 나는
그런 선택을
용기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저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는
끝내 이해할 수 없는 방향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상한 변화가 생겼다.
그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는데,
그가 끝내 외면하지 않았던
어떤 마음에는
자꾸만 고개를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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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식스펜스의
스트릭랜드가
지금의 나에게
다르게 읽히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의 선택이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그가 끝까지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는 점,
비루한 현실과 굶주림 속에서도
오직 하나의 열망을
놓지 않았다는 사실만은
부정하기 어렵다.
⸻
이상하게도
그 지점이
요즘의 나를 건드린다.
나는 아직
떠나지 않는 사람이고,
떠날 계획도 없다.
현실을 버릴 용기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을
자꾸만 되돌려 보게 된다.
나는
얼마나 자주
나 자신을 설득하며 살고 있을까.
내 안의 목소리를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누르며,
정작 나 자신에게는
무책임하게 굴고 있는 건 아닐까.
⸻
떠나지 않는 삶은
언제나
현명해 보인다.
책임을 지고,
관계를 유지하고,
균형을 맞춘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금씩
내가 지워지고 있다면,
그건
과연 안전한 선택일까.
어쩌면 요즘의 나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을
존경하게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도
자기 자신을 끝내 놓지 않으려는 삶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트릭랜드처럼
모든 것을 태워버릴 용기는 없지만,
내 안의 불꽃이
완전히 꺼지지 않게
지켜낼 방법이 있는지를.
⸻
나는 아직
떠나지 않는 쪽에 서 있다.
다만
현실이라는 책장 사이에
내 마음의 페이지가
완전히 접히지 않도록
손가락 하나를 끼워둔 채
머무르는 방법을
배우고 있을 뿐이다.
현실의 역할과
나의 자아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고
서 있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