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자신의 상관에게 공황장애로 더 이상 회사를 다니기가 힘드니, 다른 포지션으로 옮겨달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힘들어서 한 달 동안은 휴직도 했었는데, 결국 사무실만 들어가면 생기는 공황장애 증상을 견디지를 못하고 이야기를 해버린 것이다. ( 장소 때문인지 사람 때문인지 둘 다 때문인지 아직도 구별이 안된다.)
남편의 회사는 작은 개인회사다. 다른 포지션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현장에 내려가서 현장직으로 기계를 만지는 일을 하든지, 다른 회사에 가던지 둘 중 하나다. 상관에게 그 얘기를 했다고 나에게 말하던 그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그냥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그 말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속이 문드러졌다. 애는 어떡하라고? 또 회사를 그만두고 구하는 과정을 반복하는 건가? 대체 몇 번째이지? 또 그 피 마르는 과정을 반복해야 하는 건가? 우울함에 술을 마셨다.
그러던중 회사 거래처의 어느 이사님께서 남편의 컨디션을 파악하고는 북미에 주재원으로 가면 좋겠다는 의견을 들었다고 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단 한마디였는데, 못 갈 이유가 백만 개는 되지만 이상하게 내 마음속에는 매일매일 가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흘러넘쳤다.
바닥을 친 우울증과 공황장애 이후 처음으로 꿈이라는 게 생겼다.
나는꿈을 꾸었다. 일 년 동안 랭귀지 코스를 다니든지, 아니면 나도 같이 회사에 입사해서 외국인들과 일하는 꿈. 회사가 자리 잡아 가는데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꿈. 아이가 외국어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는 꿈. 타인의 평가에 너무도 민감한 남편이 한국인이 거의 없어 자신을 지켜볼 눈이 거의 없는 곳에 가서 자유롭게 살면서 생각이 크고 넓어져서 성장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꿈. 누구는 돈 들여서 가는 그런 곳을 갈 수 있으면 어떨까 하는 꿈. 상상 속에서 나는 너무나도 행복했다.
상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남편의 거취는 어떻게 될지 모르고, (회사에 말을 한지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아직 결정된 사항이 없어서 굉장히 초조하다.) 미국에 가는 건 그저 누군가의 생각일 뿐이지 전혀 타당성에 대해서 리뷰된 것도 없다. 그런데, 상상하기 시작했다.
우울의 시간을 오 년을 넘게 겪고 나서 처음으로 핑크빛, 환한 빛의 상상을 하기 시작하니 하고 싶은 것들이 마구마구 떠올랐다. 이제 본격적으로 스피킹 연습을 해야겠구나, 책을 읽어야겠구나, 체력을 길러야겠구나, 술과 영원히 이별해야하겠구나. 그런데 그런 것들이 의무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안달 나게 하고 싶어서 떠오른 목록이었다. 만일, 해야만 하는 것들이었다면 짜증이 나고 힘들기만 했을 일들이다.
나는책을 읽기 시작하고 유튜브를 보기 시작하면서 지난 한 달 넘게 가장 공을 들였던 것이 잠재의식이었다. 내 안에 있는 우울을 몰아내기보다는 잠재의식 자체를 바꾸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세뇌하듯이 틈만 나면 유튜브를 들으면서 운전을 하고 책을 읽었다.
이런 작업들은 콩나물 키우는 것과 비슷하다. 물을 주기는 주지만밑으로 다 흘러내려서 물은 먹기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매일매일 하다 보면 어느 날 콩나물이 자라 있는 걸 볼 수 있듯이 매일매일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더라도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진 걸 볼 수 있다.
우울함 속에선 모든 감정들이 흑백 티브이처럼 색을 잃는다.
우울함은 사람의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그것도 부정적인 감정과 상황들만으로 순식간에. 그러면 그 어느 감정도 빛이 바래져서 온전히 느끼지를 못한다.
그런데 내가 꾸는 꿈에 나의 잠재의식이, 나의 마음이 처음으로 반응한 것이다. 상상을 하고 방향을 설정하고 온전히 기쁨을 맛본 것이다.
앞으로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른다. 허나 지금의 기분이라면 무엇이든지 할수 있을것 같다. 몇 년 만에 맛보는 온전한 감정의 맛에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