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그러운 과학, 우리 풀 이야기
얼마 전, 동강유역 생태경관보전지역에서 봉오동전투 영화를 촬영하던 중 할미꽃 서식지 훼손을 하여 벌금을 냈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기사에는 할미꽃으로 나왔지만, 사실은 국외반출 승인대상 생물자원이며, 한국의 고유생물인 동강할미꽃의 서식지가 훼손되었다고 들었어요.
그 후 기사가 사실이 아니며 동강할미꽃 서식지는 훼손되지 않았다는 기사도 따로 나서 정말 다행이었지만 며칠은 동강할미꽃으로 마음이 아리고 속상했습니다.
서식지가 훼손된 것이 아니라면 정말 다행이다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이번 기회에 귀한 사연이 가득한 동강할미꽃과 더불어 다양한 우리 고유 생물자원의 소중함과 관리의 필요성이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동강할미꽃은 몇 안 되는 우리나라 식물학자 이름이 붙은 한국의 고유생물이라 저도 굉장히 애착을 가지고 있던 식물이에요.
동강할미꽃은 우리나라에만 자라며, 우리나라에서도 강원도 강릉, 삼척, 동해, 영월, 정선 등지에서만 자라는 아주 희귀한 식물입니다. 자생지가 주로 석회암 지대이다 보니 석회석 채굴에 의해 자생지가 훼손되는 경우가 많아 발아 연구를 많이 하는 희귀종인데요, 증식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증식이 어려운 식물 중 하나예요.
바위틈에서 피어나는 보랏빛 꽃이 아름답고 강인한 생명력을 잘 나타내어 자생식물을 소재로 한 달력의 모델로도 매년 자주 등장하는 동강할미꽃은 그 자체로도 영화만큼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강할미꽃은 달력 모델로 데뷔하며 세상에 알려진 식물인데요, 1997년 사진작가 김정명 선생님이 최초로 촬영하시고 달력으로 제작하여 세상에 첫 공개하셨지요.
처음 동강할미꽃을 발견하고 촬영하신 김정명 선생님은 이를 할미꽃인데 줄기가 꼬부라지지 않고 하늘을 향해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연구 대상인 식물이라고 하셨어요. 이를 보시고 식물학자이신 이영노 박사님과 이택주 원장님께서 2년 동안 연구하여 할미꽃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식물 종이라는 것을 밝혀내셨습니다.
그리하여 동강할미꽃은 2000년 학계에 공식으로 등록되어 우리나라의 고유 생물자원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공개되고 인정받은 지 약 20여 년 정도로 굉장히 최근에 알려진 식물이에요.
동강할미꽃의 학명은 Pulsatilla tongkangensis Y. N. Lee & T. C. Lee 인데요,
종명인 tongkanensis는 우리나라 동강에서 발견되었다는 의미를 담은 뜻입니다.
명명자인 Y.N. Lee & T.C. Lee는 우리나라의 식물학자이신 故이영노 박사님과 한택식물원의 이택주 원장님이세요.
지난번 대부분의 우리나라 식물에는 Nakai라는 일본 식물학자가 명명자로 들어가 있고 일부 식물에는 독도가 아닌 takesimense 등 다케시마를 의미하는 식물명이 정식 학명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서글픈 글을 남겼었는데요, 동강할미꽃은 우리나라의 학자가 명명자로 붙고, 우리나라의 지명이 종명으로 사용되며 명명자가 아직 생존해있는 아주 귀한 스토리가 있는 식물이에요.
보통 할미꽃은 양지바른 무덤가에 많이 피는 꽃인데요, 그에 반해 동강할미꽃은 척박한 석회암 절벽 틈에서 자랍니다. 동강할미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할미꽃과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요, 꽃이 땅을 향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개화한다는 점과, 일반 할미꽃의 색은 진한 보라색인 반면 동강할미꽃은 연보라, 연분홍, 자홍색, 회분홍, 미백색 등 상당히 다양한 색의 꽃이 피는 특징이 있어요. 개체수는 많지 않고 서식지도 몇 안 되는 희귀 식물이지만, 꽃의 색이 다양하다고 하니 식물학자로서 관심이 안 갈 수 없는 식물이지요. 서식 위치마다, 개체마다 색이 다른 꽃이 피는 식물이라니! 게다가 동강할미꽃은 albino type으로 흰색의 꽃이 피기도 합니다.
석회암 지역에 뿌리를 내리고 살 정도고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동강할미꽃은 안타깝게도 발아가 되더라도 번식은 잘 되지 않아요. 우리나라의 소중한 자원이기에 군락지를 넓혀보고자 동강할미꽃 마을에서 보존연구회까지 만들어 노력하고 있으나 새로 증식시키면 생존율이 낮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생명공학 기술이 발달해서 예전에는 발아가 어렵다고 알려진 식물도 발아 적기를 과학적으로 구분하여 발아시키거나, 조직배양 기술을 이용해서 식물을 증식시키는 등 멸종위기의 식물을 복원하는 기술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어요. 그러나 식물의 싹을 틔우고 어린 묘까지는 재배할 수 있어도 완벽한 개체로 자라게 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습니다. 특히 동강할미꽃처럼 척박한 특정 환경조건에서만 자라는 식물들은 생육 속도가 느리고 그렇게 천천히 자라던 중 온도, 습도 등의 조건이 조금만 맞지 않아도 금방 죽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생지가 훼손되면 그 정도의 개체를 다시 키우는 일이 굉장히 어렵지요. 게다가 일반적으로는 식물이 자랄 수 없는 토양 비옥도가 낮은 염기성 토양에서 자라기 때문에 다른 식물들의 환경조건으로 예측하여 비료를 주거나 하는 것도 매우 어려워요.
아마도 지금 자생지에 살고 있는 동강할미꽃은 많은 개체들이 석회암지대에 싹을 틔우고 자라려고 했으나, 대다수는 거센 바람과 뜨거운 태양 그리고 부족한 양분을 견디지 못하고 말라 죽고, 그중 몇 개 되지 않은 강력한 개체들이 남아 아주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서 버티고 살아남은 것 아닐까 싶습니다.
인체에 유용한 기능을 하는 식물의 2차 대사산물들은 주로 식물이 척박한 환경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낸 물질들이에요. 식물에 들어있는 폴리페놀 등의 항산화 물질도 사실 식물이 환경에 대응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만들어낸 물질들이죠. 그래서 동강할미꽃처럼 아주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식물들은 유용한 물질이 아주 많이 들어있거나, 다른 식물에는 들어있지 않은 고유한 성분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만, 개체 수가 적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이용하기는 어려워서 아직 아무도 연구를 하지 않았을 뿐이죠. 개인적으로는 동강할미꽃에도 고유한 유용물질이 많이 들어있을 것으로 예상하지만, 희소한 식물이라 건조하고 추출하는 등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볼 수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언젠가는 동강할미꽃의 개체 수가 늘어나서 우리나라 고유 식물자원의 산업적 가치에 대해서도 연구해 볼 날이 오겠지요.
식물은 한해살이풀처럼 딱 일 년 살고 그냥 사라지는 식물도 있지만 동강할미꽃처럼 여러 해를 같은 자리에서 버텨온 여러해살이풀도 있어요. 어떤 식물이 한 곳에서 그 오랜 시간을 다 견디어 낸다는 것. 그 식물 안에 쌓인 세월의 흔적들은 그 자체로도 고귀할 뿐 아니라, 때로는 사람에게 이롭게 이용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 고유 식물은 조금 더 특별하게 관리했으면 좋겠습니다. 조금 더 특별한 관리를 위해서는 어떤 식물이 우리나라 고유의 생물자원이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모두가 쉽게 이해하는 날이 와야겠지요.
이번 영화 촬영 중 동강할미꽃 서식지 훼손 사건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분노했던 것은 서식지는 한 번 훼손되면 복원이 아주 오래 걸리거나 거의 불가능한데, 파괴한 대상은 벌금만 내면 끝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생물자원의 소중함에 대해 국민들이 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끼고 보호할 수 있도록 많은 홍보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하고, 훼손에 대한 처벌도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번 일을 계기로 동강할미꽃에 대해 국민들이 조금 더 잘 알게 되고, 우리나라 고유 생물종의 소중함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다음에는 한 번 훼손하는 건 순간이지만 복구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자원식물의 서식지 보존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고 이런 일이 다시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동강할미꽃의 가장 큰 서식지인 강원도 정선의 귤암리에서는 매년 3월 말, 동강할미꽃 축제가 개최됩니다. 많이 알려진 축제는 아니지만 벌써 13년째 이어지고 있는 정선 동강할미꽃 축제는 다양한 체험활동과 거리로 구성된 우리나라 자생식물 축제예요. 유채꽃이나 튤립 같은 외래종 축제는 익숙하지만 알밤 등 먹거리가 아닌 우리 꽃에 대한 축제는 흔하지 않아서 새롭습니다. 동강할미꽃에 대해 최근 불거진 서식지 훼손에 대한 이슈가 일시적으로 끝나지 않고 내년 동강할미꽃 축제는 다른 해보다 더 성황리에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정선 동강할미꽃 마을: http://www.idongg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