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등나무 줄기와 엉켜 있던 포도 가지에선 9월 내 생일 즈음이면 알알이 작은 포도알이 매달려 있었다..
실인즉 , 그 시절엔 등나무 꽃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다만 가을이 시작되면 그 자리에 작은 알알이 맺히는 작은 포도알에 관심이 집중됐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주택들은 크기와 관계없이 집 마당에 꽃이나 화초가 가득했었다.
우리 집의 등나무와 포도 넝쿨은 좀 특별했었다 싶다.
지금 생각해도.
다섯 살 시절 어렴풋한 기억 속에 인천에 살던 기억보다는 외가인 당진 할머니 댁에서 외증조할머니 (키가 크신)와 참외를 숟가락으로 긁어먹던 기억과 집 앞 수레에 누에고치가 가득했던 풍경( 그 앞에 누에 공장이었단다 ), 동네 친구들의 얼굴? 솔직히 하나도 기억엔 없지만 같이 시냇가 앞에서 놀던 일, 셋째 이모네 학교까지 큰길 따라갔다 위험한 길을 걸어왔다고 무지하게 혼난 기억... 정도이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는 서울 그 많은 자녀들 집 중에서도 우리 집에를 제일 많이 오셨었지 싶다.
결혼을 하고 나이 들어서 알게 된 진실은 내가 매 번 누누이 지껄이지만 딸도 편해야지만 사위가 편해서 가능한 일이었지란 사실이다.
아무튼 등나무와 포도넝쿨의 망원동 집에 대한 첫 기억은 주일 아침이었던 것 같은데 동네 큰길 어귀에서 얻어 탔던 소가 끄는 달구지에서 내려 동네 입구를 뛰어 우리 집 앞으로 달려서 엄마한테 안겨 엉엉 울던 기억, 동네 양쪽 집 대문들 앞엔 내 또래의 소녀소년들이 물끄러미 우릴 쳐다보았던 풍경이 유난히 또렷하다 지금도..
이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 등나무 덩굴과 포도덩굴이... 거늘
참 희한하게도 마당의 오른쪽 등나무 덩굴에선 찍은 사진이 없다..
(이 사진은 아마도 망원동 이사 전 인천 시절인듯하다 /. 이 모든 사진들은 일찍 돌아가신 내 아버지의 사진기 양글 속이었었다 )
아마 많이 서러웠었나 보다 내가,
내 동생 임신 뒤 나이 든 상모로 유산을 막으려던 엄마의 조치 중 하나가 날 당진의 외가 댁에 자주 맡기시는 것이 었다는 진실은 성장하며 알게 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