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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남녘의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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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ily May 10. 2022

남녘의 봄

잠시 들리게 됐던 그곳 1

어버이날 시댁을 챙기러 올라오던 일정 중에 빠른 출발로 어쩌다 아주 잠시였지만, 다시금 발길을 머물 게 됐던 그곳을 잠시 소환합니다.


코로나의 감소와 위드 코로나로 전국 어디나 인산인해인 이즈음 , 그곳 역시 주차가 가장 어려웠었다.

그래서도 짧게..


영주의 무섬 다리와 무섬마을을 부산 쪽에서 칠서 휴게소 뒤로 갑자기 방향을 틀고 보니 안동 지나서는 한적한 시골일 마냥 펼쳐졌었다.

계절의 여왕 오월에 말이다.


잠시 구글 검색으로 무섬 다리에 관한 글을 먼저 올려보련다

처음에는 '물 섬마을'이라 불렸다고 전해진다. 발음상의 이유 때문인지 'ㄹ'이 빠지고 무섬마을이 되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에 폭 안긴 자태가 영락없는 물속의 섬이다. 양반도 평민도 모두 함께 공부했다는 조용한 선비의 마을, 무섬마을로 들어서 보자.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동해로 향하다 방향을 틀어 중앙고속도로 내려서면 충북 제천과 단양을 지나 경상도 땅에 들어선다. 곧 경북 영주를 필두로 양반의 고장이 시작된다. 영주와 이웃한 봉화 닭실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은 전국구 양반마을 아니던가. 이웃한 영주에는 그보다 덜 알려졌지만 그래서 더 고즈넉한 양반마을이 있다. '양반마을'보다는 '선비마을'이 더 잘 어울리는 공간, 삼면이 물줄기에 안긴 무섬마을이다.

양반과 평민 함께 공부하던 육지 속 섬마을

무섬마을을 보면 세 번 놀란다. 우선 마을을 품은 산과 물줄기에 놀라고 그 안에 들어선 고택들에 놀란다. 마지막으로 이 마을이 품은 개방·개혁 정신에 놀란다. 자연환경, 즉 비주얼(Visual)은 물론 멋진 몸매와 정신까지 갖춘 무섬마을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꾸려가던 선조들을 만나보자.

무섬마을을 감싸 안은 물줄기는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다. 아예 물 위에 떠 있는 섬은 아니지만 보기에는 '물속의 섬' 같다. 삼면은 내성천 줄기에 안겨있고 뒤로는 태백산 끝자락과 이어진다.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를 떠올리면 모양은 비슷하다. 단종의 한(恨)이 건너지 못할 만큼 깊은 물과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을 절벽으로 막혔다는 점만 뺀다면.
한문으로도 똑같다. 물 수(水)에 섬도(島)를 써서 수도리다. 무섬마을은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에 자리한다. 뭍과 이어진 마을 뒷산은 태백산 줄기, 강 건너에는 소백산 줄기가 스며든다. 태백산에서 이어지는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흐르는 서천이 이곳에서 몸을 섞어 '물도리동'이라고도 불렸다.
1666년, 현종 7년에 반남 박 씨가 강 건너 마을에서 이곳으로 분가하러 들어왔어요. 그때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거죠. 그의 증손녀 사위 선성 김 씨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두 성(姓)씨 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 되었어요. 해방 전만 해도 100여 가구가 넘는 큰 마을이었는데 80여 년 전쯤 갑술년 수해라고 큰 홍수가 나서 절반은 손실됐지요. 지금 남은 고택은 43 채예요. 사람이 사는 집은 26채뿐이고요. 독거노인이 많다는 뜻이죠. 평균 연령은 78세, 우리 마을에서 60대는 2명뿐이에요. 청년들이죠. 90은 넘어야 노인 대접을 받아요."40여 채의 고택 중 30여 채가 조선 후기의 사대부 가옥이다. 반남 박 씨 입향시조가 지은 만죽재, 선성 김 씨 입향시조가 지은 해우당 등을 포함해 9채가 지방문화재이다. 일제강점기, 김화진 선생이 세운 아도서숙도 빼놓을 수 없다. 아도서숙은 1933년 일제에 강제로 폐숙될 때까지 주민들에게 한글과 농업기술을 교육했던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다. 고증을 거쳐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내성천을 건너 무섬마을에 들어오면 오래된 시골마을에 들어선 것 같다. 매점도 식당(무섬골동반·054-634-8000)도 한 곳뿐이다. 아직 관광지화 되지 않아 찾는 이들이 넘치지 않는다. 내성천을 끼고 펼쳐진 드넓은 백사장에서 물놀이를 즐기다 조용한 고택에서 쉬어가기 괜찮다. 현대적이고 편안한 것 대신 여유 있게 한 박자 쉬어가고 싶은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공간이다. 2012년 7월 말에는 아직 인터넷도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구글 한국 관광공사 인용


이번으로 두 번째였던 그곳.

첫 번째는 코로나 전 영주 사는 벗 부부 덕에 여유 있게 다리도 거닐고 마을도 돌고 다리 건너 마당 넓은 장소에서 바비큐까지의 호사스러운 그곳의 추억이었다.

다음 기회엔 좀 지긋이 머물며 , 무섬 문화촌까지 둘러봐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랴..

오월의 어린이날 , 그곳을 소환한다

마을 한쪽으론 빽빽이 주차가...

마을을 휙...

아쉬움 가득히 나오던

옆지기의 베프중 풍기 출신이 전화로 가르쳐 준 순흥의 묵밥 집으로 서둘러 차를...

그러나 그 유명하다는 묵집은 번호표도 없이 인산인해에 , 주인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해서 십분 이상 주차로 씨름한 시간도 잊고 다시 나와버리고 차선 책으로  지나쳤던 간판의 묵집으로  허기진 배로 들어섰다..


한적한 식당엔 우리를 선두로 앞의 유명세의 식당서 불쾌감을 가득 안고 나온 손님들이 들어섰고,


우린 묵밥 하나 , 메밀 전변 하나 , 막걸리 하나를  주문하니 주인장께서 주전자에 따라 마시라며  ~~


어머나 밑반찬으로 나온 고추장아찌와 북어무침 , 파김치 등  맛이 일품이었다..

곧장 서울로의 이동이면 반찬을 파시라고 가져가고 싶을 만큼 말이다..

어쩐지 들어서는 입구에 장독대가 범상치 않았었다...


아쉬움에 공깃밥을 추가  장아찌와 북어무침으로 나눠서 뚝딱!

언제고 기회가 닿으면 다시 들리겠습니다.

 먹었습니다 하고 공손히 인사를 드리고 나오니 마당의 풍기견 두 마리가 보여 갖고 온 삶은 고구마를 던져주고 하늘을 찌를 나무 위엔 커다란 새둥지도 보이고...

오월의 신록에 막걸리 주전자에맛갈스런 맛에 앞의 유명 새 순흥 묵집의 불쾌감은 깨끗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다.

참 순흥묵집 주차장 앞 주택집앞의 금낭화는 놓칠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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