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
나는 관광지를 보고 단순히 "와, 예쁘다" 하고 끝나는 식의 감상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관광지란, 그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엿볼 수 있게 해주고, 그를 통해 울림이나 깨달음을 얻게 해주는 매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저 여행객처럼 관광지를 하나씩 ‘도장깨기’ 하듯 둘러보고 단순한 인상만 남긴 채 돌아오는 일은, 내게는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창작이었다. 미약한 예술적 재능이지만, 창작을 한다는 것은 무언가에 깊이 몰입하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나는, 몰입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이라고 믿는다. 하나의 것에 빠지면, 그 주변의 모든 것이 질문이 되고, 해석이 되며, 이야기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몇 달 전 유럽 여행을 계기로, 관광지에 갈 때마다 하나의 대상을 정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명한 것들을 그리기도 하지만, 내가 특히 좋아하는 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법한 공간을 그리는 일이다. 아무리 외진 구석에 놓여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더라도, 그 장소에 무언가를 발굴하거나 세우거나 새긴 사람은 분명 어떤 의미나 대의를 담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있는 노력과 디테일을 발견하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관광지를 찾을 때면 항상
‘사람들이 가장 관심 두지 않을 곳은 어디일까?’
를 먼저 생각하고 그곳으로 향한다.
이곳은 태국 파타야에 위치한 '진리의 성전(The Sanctuary of Truth)'이다. 1981년부터 건축이 시작된 이 목조건축물은, 수많은 예술가들이 수십 년간 목재를 정성껏 깎아 만들어낸 거대한 예술 작품이자 관광 명소다. 종교, 철학, 예술이 조화롭게 결합된 이 공간은 아직도 완공되지 않았지만, 그 미완의 아름다움이 오히려 이곳만의 매력이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이 잘 가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았다. 건물 내부보다는 외벽에 달린 조각들이 눈에 덜 띌 것 같았다. 그래서 건물 안에서 바깥 조각을 바라볼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조용히 이동했다.
건물 외부는 물론 바깥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물의 전체적인 모습만 눈에 담을 뿐, 세세한 조각이나 디테일에는 좀처럼 시선을 두지 않는다. 특히 맨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2층 외벽의 조형물들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조용히 서서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겉보기엔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공간에서 한 여자애가 몇 분 동안 무언가에 집중해 그림을 그리고 있으니, 그것 자체가 신기했던 걸까. 점점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배경이 예쁜 장소에서 사진을 찍던 사람들도 어느새 내 쪽으로 다가와, 뒤에서 슬쩍슬쩍 내 그림을 엿보았다.
그 시선은 나쁘지 않았지만 이 그림을 다 그리기 전까지는 난 구조물에 집중해야했다. 구조물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깎는 사람의 마음부터 이 동상이 의미하는 것까지 여러가지를 상상해볼 수 있었다.
구조물의 그는 마치 무엇인가를 조용히 이야기하려는 듯 두 손을 들어 무언가를 전하려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멈춰라,” “여기를 보아라,” 혹은 “여기엔 이야기가 있다”라고 말하는 듯 했다. 조각상을 그리는 순간 만큼은 단순히 ‘조각상을 본다’는 행위에서 벗어나,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이 조각상을 깎던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아마도 그는 단순히 일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이 맡은 조각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였을 것이다. 반복되는 작업 속에서도 손끝의 디테일에 신경 쓰고, 표정이나 자세가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신중하게 다듬었을 것이다.
조각 속 인물의 손짓이나 눈매를 보면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는 분명 이 인물에 어떤 의미를 담고 싶었을 것이다. 그게 신에 대한 믿음이든, 누군가의 보호자 같은 이미지든, 혹은 단순히 이 건물을 찾은 사람이 잠깐이라도 멈춰 보게 만들고 싶었던 의도였든 간에.
그 마음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그 조각 앞에 선 내가 그런 상상을 하며 이 인물을 그림으로 다시 옮기고 있다는 사실에, 조각가는 어딘가에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림이 거의 마무리되려는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니 한 남자가 따봉을 들어 보이며 말을 걸었다.
잘 그렸다. 당신은 좋은 예술가에요.
나는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연필을 들었을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낙서에 가까운, 틈 사이에서 그린 조잡한 선들이었고, 내가 봐도 어딘가 엉성한 그림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내게 ‘예술가’라고 했다.
감히 나를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순간 멈칫했다. 예술가라는 말은 나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호칭이 주는 따뜻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누군가에게 내가 하는 행위가 영감을 줄 수 있구나 싶었다. 부족한 솜씨라도, 진심이 담기면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는 걸.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정말 예술가였을지도 모른다.
그 짧은 0.1초 동안, 나는 이 사람에게 기억에 남을 순간을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를 창작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특히 그림이라는 건, 펜과 종이만 있다면 언제든 작은 노력으로도 누군가를 기쁘게 만들 수 있다.
칭찬이 기분 좋게 다가와 나는 남자를 그려보겠다고 말했다. 그는 약간은 어색한 듯했지만 기쁜 표정으로 30초가량 조용히 서 있었다. 어색함이 오래 가지 않도록 나는 1분 안에 빠르게 그림을 완성해 그에게 건네주었다.
예상보다 빨리 완성된 그림을 받은 그는 놀란 표정으로 연신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 순간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든, 이 여행의 하루가 특별하게 기억될 거란 사실만은 분명하다.
가장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도 신념과 이야기가 숨어 있던 진리의 성전. 그곳에서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을 전한 오늘도, 나에게는 충분히 낭만적인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