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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촌부리 공장의 밥 짓는 사람들

태국공장의 점심식사

by 에밀리
신입: 식당은 어디인가요~?

첫 출근 날,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면서 회사 구조와 건물 이름을 하나씩 설명해주시던 분께, 나는 결국 물어보고야 말았다. “저기... 식당은 어디에 있나요?”


괜히 좀 부끄러웠다. 회사의 사내 시스템이나 생산 라인보다 밥이 먼저 궁금한 내가 너무 MZ사원인가?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그 자료에 분명히 ‘Canteen’이라는 단어가 큼직하게, 그것도 빨간 글씨로 써 있었는데.


먹는 건 중요하니까...



그래서 오늘은 밥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우리가 매일 부딪히는 이 공장, 수백 명의 노동자들과, 오피스의 우리들. 그들이 하루의 리듬을 어떻게 밥과 함께 맞춰가는지에 대해서.


태국 공장의 점심시간은 두 타임으로 나뉜다. 워낙 인원이 많다 보니 11시, 그리고 12시. 오피스라고 예외는 아니다. 현장을 관리하는 사람들도 모두 각 부서에 따라 식사 시간이 다르다.


카드보드박스 팀에서 일하는 (박스를 만들고 프린트를 하는 공장이다) 동갑내기 친구는 항상 점심시간이 11시다. 반면, PID (생산개선부)의 우리들의 점심시간은 12시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오피스는 소등된다.


불을 꺼야만 점심시간이 시작된다는 무언의 신호일까. 전기세를 아끼자는 취지인지, 아니면 직원들에게 일에서 잠시 떨어지라는 배려인지 알 수는 없지만, 소등된 사무실에서 컴퓨터 불빛을 앞에 두고 밥을 먹는 모습은 어딘가 짠하고 또 우습다.


나는 오피스에서 밥을 먹는 경우보다 나가서 먹는 경우가 많은데, 구내식당이 있음에도 근처 포장마차로 가서 밥을 사먹는 편이다. 나는 ITS (IT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부서) 와 함께 밥을 먹는다.


회사에 들어온 첫날, 나를 입사시킨 부장님은 젊은 여자 직원 둘을 데려와 '친구'라며 소개시켜줬다. 공장에 젊은 여자가 많이 없다나. 그렇게 소개받은 친구 하나는 나보다 2살이 많았고, 다른 한명은 10살이 많았다. 어린 여자 인턴이 혼자 타지 공장에 와서 외로울까봐 같이 밥도 먹고 놀러다닐 수 있는 친구를 소개해준 모양이었다. 나도 인턴이 나 하나뿐인걸 알고 있어서 혼자면 어쩌지...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이런 사교적인 부분에 대해 많이 챙겨주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항상 점심시간 12시가 되자마자 나는 메이와 펀이 있는 부서로 간다. 메이는 자가용이 있어서 200m도 채 안되는 거리지만 더운 날씨에 걷는게 싫다면서 나와 다른 부서 사람들을 태우고 식당으로 간다.


삐...삐...삐...삐...


운전자석은 당연하지만 안전벨트를 차지 않으면 이런 소리가 나는데, 이 소리가


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삐


로 바뀔 때까지 안전벨트를 차지 않고 이동하면 포장마차에 도착한다.

정말 회사 밖으로 나와 50m도 안되는 거리에 있는 포장마차인데 메이 덕분에 걷지 않을 수 있다.


구내식당이 없는건 아니다. 사실 내가 입사 첫날 물었던것처럼, 이 회사에는 800명이 넘게 사용하는 구내식당이 있다. 공장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11시부터 1시까지 교대로 점심시간을 가지는데, 점심시간을 가지는 부서의 기계는 멈춘다.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번에 구내식당으로 우르르 몰리면 안되니까 이렇게 시간을 나눠서 먹는 듯 하다. 구내식당은 밥을 사 먹을 수 있는 상점이 여러개 줄지어져 있고, 간식을 사 먹을 수 있는 상점과 음료를 파는 카페형식 상점이 있다. 11시만 되면 사람들이 미친듯이 몰리는데, 그래서인지 현장이 아닌 오피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오피스 사람들이 주로 가는 이 '포장마차'는 평균 1500원의 가격으로 온갖 태국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데, 볶음밥, 고기류 음식 뿐만 아니라 똠양꿍같은 국물 음식도 파는걸 보아 온갖 태국음식은 여기서 다 맛본 듯 하다...


언젠가 한 번, 아이스크림차가 포장마차 앞에 나타난 적도 있었다. 무심히 지나가려다 그날만큼은 아이스크림을 샀다. 야외라서 그런지 운 좋으면 그런 행운도 온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뿐이지만.


그보다 더 기억에 남는 건, 포장마차에서 음식을 준비해주시는 이모님들이다.

쉴 틈 없이 팔을 움직이며 커다란 웍을 흔들고, 손에는 항상 국자나 주걱이 들려 있다. 불 앞에서 한참을 서 계시는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능숙하게 주문을 받고, 음식이 완성되면 쟁반에 하나씩 정갈히 올려준다.

태국의 태양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를 정도인데, 이모님들은 그 뜨거운 날씨에 야외에서 계속 불을 다룬다. 땀이 이마에서 흘러내려도 팔로 한번 훔칠 뿐, 손놀림은 멈추지 않는다.


지금부터 이 포장마차에서 먹을 수 있는 각종 태국음식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만약 여러분이 태국에 올 일이 있다면 꼭 이 음식들을 시켜보길 바란다.


똠얌꿍(ต้มยำกุ้ง)


똠양꿍은 태국을 대표하는 매콤하고 시큼한 수프 요리다. 새우를 주재료로 사용하는데, 고추, 레몬그라스, 라임잎, 갈랑가 등 향신료가 듬뿍 들어간다. 향신료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 안 좋아할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동남아에 오래 살아서 향신료에 익숙하기에 매콤한 맛으로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국물은 칼칼하면서도 상큼한 맛이 조화를 이루어 입맛을 돋운다.


똠양꿍은 보통 밥과 함께 먹는다. 속이 더부룩할 때 개운하게 풀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며, 외국인 관광객에게도 매우 인기가 많다. 고수나 라임즙을 추가하여 취향에 맞게 조절할 수 있다.


얌운센(ยำวุ้นเส้น)

이 음식은 태국식 당면 샐러드인 '얌운센(ยำวุ้นเส้น)'이다. 얇고 쫄깃한 당면에 새우, 오징어, 양파, 고수, 토마토 등을 넣고 매콤 새콤하게 무쳐낸 요리다. 보통 피시소스, 라임즙, 고추, 설탕 등을 섞어 만든 드레싱이 들어가 시원하면서도 강한 풍미를 자랑한다.


입맛 없을 때 상큼하게 즐기기 좋은 메뉴다. 맵고 짠맛, 단맛, 신맛이 어우러져 자극적인데도 계속 손이 간다. 개인적으로는 태국에서 먹은 음식 중 가장 '한국인의 입맛에 딱 맞다'고 느꼈다. 고수 향이 살짝 올라오긴 해도, 익숙한 재료들이 많아서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었다.

가볍게 한 끼 하고 싶을 때나 더운 날 입맛 없을 때 추천하고 싶은 메뉴다.


카오팟 꿍(ข้าวผัดกุ้ง), 팟 프릭 꿍(ผัดพริกกุ้ง)

왼쪽은 태국식 새우볶음밥, ‘카오팟 꿍(ข้าวผัดกุ้ง)’이다. ‘카오팟’은 볶음밥, ‘꿍’은 새우를 의미하며, 향신료보다는 고소한 맛과 간장/피시소스 풍미가 강조된 메뉴다. 오이와 라임을 곁들여 상큼하게 먹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부담 없이 먹기 좋은 음식이었다. 익숙한 맛이라 한국 사람 누구나 좋아할 만한 맛이다.

오른쪽은 새우와 채소를 매콤한 소스에 볶아 밥 위에 올린 ‘팟 프릭 꿍(ผัดพริกกุ้ง)’ 혹은 ‘팟 꿍(ผัดกุ้ง)’ 스타일이다. 매콤짭짤한 소스와 탱탱한 새우가 아주 잘 어울린다. 매운 걸 잘 못 먹는 사람에겐 살짝 자극적일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매운맛이 너무 좋아서 밥 한 공기 뚝딱했다. 밥에 소스가 쏙쏙 배어 있어서 끝까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요리다.


팟 까파오(ผัดกะเพรา)

이 두 음식은 모두 태국의 국민 메뉴인 ‘팟 까파오(ผัดกะเพรา)’ 시리즈다. 바질(가파오) 향이 강하게 나는 매콤한 볶음 요리로, 밥 위에 올려 먹는 스타일이다.


오른쪽은 다진 고기를 사용한 팟 까파오 무쌉(돼지고기) + 카이다오(계란 프라이) 조합이다.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형태로, 바삭하게 튀긴 계란과 잘게 볶은 고기, 바질, 고추, 마늘이 어우러져 감칠맛이 강하다.

처음 태국 음식 먹는 사람에게도 무난하게 추천할 수 있는 메뉴고, 개인적으로는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맛있었다. 매콤한 향과 단짠의 밸런스가 아주 훌륭하다.


태국에 온 첫날 먹었던 음식도 이 음식인데, 처음 먹은 순간부터 내 최애 음식으로 등극해 1주일에 3번씩 먹는 것 같다.


프릭남플라(พริกน้ำปลา)

이건 태국 음식점 테이블마다 꼭 있는 프릭남플라(พริกน้ำปลา)이다. ‘프릭’은 고추, ‘남플라’는 피시소스(액젓)를 뜻하는데, 매운 고추를 송송 썰어 넣은 피시소스에 라임즙이나 마늘을 살짝 더한 양념장이다.


짭짤하면서도 톡 쏘는 매운맛이 입맛을 확 살려주고, 밥 위에 한두 숟갈 뿌려 먹으면 그 자리에서 태국 로컬 입맛으로 변신할수있는 마성의 소스...


메이는 내가 이 소스를 너무 좋아하니까 한국으로 돌아갈때 이 소스를 사주겠다고 말한다. 정말 최고의 선물일 것 같다. 이 소스는 특히 팟까파오, 볶음밥, 계란요리 위에 뿌려 먹으면 감칠맛이 미쳤는데, 개인적으로는 이거 없으면 안될 정도로 중독되는 맛이다.


꼭 태국식당을 가서 태국음식을 먹을 일이 있으면 뿌려먹길 바란다.



태국 공장에 온 지 겨우 4주밖에 되지 않았지만, ‘점심시간’은 벌써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하루하루는 낯설고 새로운 것 투성이지만 유일하게 반복되는 건 12시가 되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그 안에는 조금씩 다른 표정과 온도가 있다.
더운 열기 속에서 수십명의 음식을 요리하시는 포장마차 이모님, 안전벨트를 끝까지 안 매는 메이,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아이스크림차 같은 작은 사건들.


밥 한 끼에 이렇게 많은 장면이 들어 있을 줄은 생각치도 못했지만 오늘도 태국의 점심은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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