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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슬라 15화

by 백서향

인간 세상에도 매서운 추위는 찾아왔다. 그나마 가을에 내린 생명의 비 덕분에 춥지만 배는 곯지 않아도 되었다. 할 일이 없는 인간들이 매디의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농사를 짓던 그들은 겨울이 되자 시간을 때울 장소를 찾기 시작했고 매디의 식당에 모여 술과 게임을 즐겼다.


"야!"


술이 잔뜩 취한 남자의 고함에 라온이 쪼르르 달려갔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술 가져오라고 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라온의 뒤에 어느샌가 나타난 매디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서 있었다.


"아니다. 아니야."


매디를 본 남자는 질겁을 하며 서둘러 문밖으로 나갔다. 매디가 굳이 빗자루를 들어 올릴 필요도 없었다.


"휴, 이제야 쉴 수 있겠네."


식당 안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남아 있던 다른 손님들도 탁자 위에 술값을 내려놓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매디가 화가 나면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저녁마다 찾아오는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식당이 처음에는 즐거웠던 매디도 이제 지쳐가고 있었다. 어서 이 겨울이 끝나고 모두 각자의 생활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저들도 여기를 오는 게 꼭 좋아서만은 아니었다. 다른 일을 찾으려 하다가도 시간을 보내려 낮부터 들어오는 손님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어머니, 손님들이 많이 오면 좋잖아요. 돈도 많이 벌고. 왜 그렇게 매번 쫓아내세요?"


매디는 어린 네가 뭘 알겠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웃고는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매디가 라온에게 어머니라고 부르라 한 건 식당의 손님들이 늘어나면서부터였다. 식당에서 심부름하는 작은 남자아이에게 그들은 함부로 대하기 시작했고 매디가 화를 내며 아들이라 소개한 까닭이었다. 라온은 그 후로 자연스럽게 매디를 어머니라 불렀고 매디도 그 호칭이 싫지만은 않았다.


"난 이제 들어가볼게. 문단속 잘하고 자야 한다."


"네! 어머니!"


큰 소리로 대답하는 라온을 바라보던 매디의 눈에 짧게 올라간 바지가 들어왔다. 작고 말랐던 아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라온, 내일은 나랑 시장에 다녀오자."


"식당은 어떻게 하고요?"


"그까짓 거 하루 쉬지 뭐. 내일 아침 먹는 대로 광장으로 나와. 내일은 우리도 남들처럼 놀아보자."


"네! 어머니."


매디의 뒷모습에 대고 크게 손을 흔들던 라온은 한껏 들떠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구걸할 때만 가보던 시장을 이제는 마음 편히 구경하러 갈 수 있게 된다니. 라온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에 처음 오게 된 날을 생각하자 저절로 하슬라가 떠올랐다. 이런저런 생각에 뒤척이던 라온은 금기의 땅에 가고 싶어졌다. 어차피 내일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 오늘 꼭 자야 할 이유도 없었다.


라온은 가지고 있던 옷 중 최대한 두꺼운 옷을 입고 털신을 신었다. 밖으로 나서자마자 콧김이 하얗게 나왔지만, 추위마저 시원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하루이틀 사이에 확연히 달라진 날씨에 라온은 조금은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발이 차갑다 못해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지고 있었다 .


이제라도 돌아갈까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저 멀리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인 듯했다. 라온은 혹시 하슬라가 만들어내는 불빛인가 싶어 언 발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덩굴이 보이고 숨겨놓았던 구멍에 다다르자, 라온은 실망했다. 불빛이라 생각했던 것은 달빛에 반짝이던 눈이었다. 인간 세상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눈을 보고도 라온은 기쁘지 않았다. 덩굴 주위를 돌면서 안쪽을 들여다보고 기다려봐도 하슬라를 만날 수가 없었다. 매번 기대를 안고 찾아왔지만, 실망만 하고 돌아가는 길이 계속되었다. 라온은 하슬라도 이런 추위에 나오지 못할 것이라 스스로를 위로하며 따뜻한 봄이 오면 다시 오기로 하고 뒤돌아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기다. 여기."


매디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길게 뻗은 손이 보였다. 웬만한 남자보다 키가 컸던 매디는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덕분에 키가 작았던 라온은 어디를 가도 매디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겨울이었지만 시장 초입부터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늦잠을 자는 바람에 아침을 거르고 나온 라온은 맛있는 냄새가 풍길 때마다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추위도 녹일 겸 우리 따뜻한 스튜 먹을까?"


매디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스튜를 끓이고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고기보다는 채소가 더 많이 들은 스튜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거친 호밀빵을 조금 뜯어 스튜에 찍고는 입안으로 가져갔다. 거친 빵이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워져 있었다. 달짝지근하면서 새콤한 국물 덕에 몸이 따끈해지고 있었다.


"퍽퍽 퍼먹어야지."


매디는 아직도 또래보다 작은 라온이 안쓰러워 자신의 스튜에서 고기만 골라서 라온의 그릇에 덜어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못 먹은 탓인지 14살 생일이 지났지만, 작은 라온은 밖에서 또래를 만나면 항상 놀림감이 되곤 했다. 그런 라온이 안쓰러웠지만 모른척하던 매디도 오늘만큼은 감정을 드러냈다.


"남자는 자고로 덩치가 좋고 힘을 쓸 줄 알아야 해. 그래야 제 여자를 지켜줄 수 있고 사랑받으며 살아."


"네?"


스튜를 입으로 뿜을뻔한 라온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매디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는 남자를 지켜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머니 같은 여자를 만나면 되죠."


"요 녀석이. 많이 컸구나."


매디는 라온에게 눈을 흘겼지만 싫지만은 않은 눈치였다. 라온은 순간 하슬라가 떠올라 괜히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배를 든든히 채운 두 사람은 원래의 목적인 옷 가게로 향했다. 매디에게 큰옷을 만들어주는 단골 가게였다.


"어머, 이 시각에 시장엘 다 오고 웬일이래? 식당 망했나?"


"그래, 망했다. 망했어."


거친 입담이 오가자, 라온은 싸움이 시작되는 줄로만 알았다. 고개를 외로 꺾어 조심히 올려다 보자 좀전의 큰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웃고 있는 두 얼굴이 보였다. 그제야 안심한 라온이 옷 가게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라온에게 맞는 옷을 사입힌 매디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갑자기 라온의 손을 잡아끌었다. 작은 동네라 시장이라 해도 규모가 크지 않았다. 자연히 시장에 자주 드나들던 매디는 시장 사람들과 꽤나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이 아이가 앞으로는 심부름을 자주 올 테니 잘해줘야 해. 만약 구박하거나 무시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그럼 알지?"


매디는 반은 농담으로 반은 협박조로 상인들을 만날 때마다 라온을 인사시키고 있었다. 그릇 가게를 지나 대장간을 마지막으로 라온의 짧지만 얼떨떨했던 시장 사람들과는 인사를 끝냈다. 매디는 라온을 밖에 세워 둔 채 대장장이와 긴 대화를 나눴다. 라온이 살짝살짝 안을 들여다볼 때마다 매디가 입을 가리며 눈을 작게 뜬 채 웃고 있었다. 매디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본 라온은 그 자리에 선 채 눈동자만 움직이고 있었다.


"가자, 라온."


매디가 성큼성큼 앞장서 걷자, 라온은 종종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어머니, 그런데 그 아저씨는 누구예요?"


"누구?"


"대장간에."


"아, 친구야. 아주 오래된 친구. 내가 식당을 열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러고 보니 라온은 아직 친구가 없구나."


"떠돌아다니면서 친구가 있었던 적이 있기도 했는데 여기서는 아직이요."


"아, 내가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어서 신경을 쓰지 못했구나. 너랑 이렇게 오랜 시간 지내면서 정이 들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가만있자. 너한테 필요한 게 옷뿐만이 아니었어. 글도 배워야 하고 친구도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식당 일도 해야 하고 이제 농사일도 바빠질 텐데요."


"그럼 일단 글부터 배우자. 저녁에 식당 정리를 하고 나면 나랑 한 시간씩 공부하고 자는 거야. 알았지?"


라온은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공부라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책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왜 대답이 없어? 식당 일이나 농사일을 하더라도 공부는 해야 하는 거야. 그동안 내가 신경 못써준 게 미안해서 그러는 거니까 같이 공부하는 거다. 알았지?"


"네……."


라온은 마지못해 대답하고 말았다. 매디는 라온의 속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뿌듯해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오늘따라 더 크게 보이는 매디의 뒷모습에 라온은 어깨가 점점 처지고 있었다.



식당 손님들에게 반강제적으로 책과 공책을 뺏어 온 매디는 밤마다 라온을 앉혀놓고 책을 읽히고 수셈을 알려주었지만, 라온의 정신은 반쯤 나가있었다. 세상에 그렇게 달콤한 자장가는 없을 것만 같았다.


"공부는 꼭 해야 하는 거예요? 어머니처럼 식당을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도 있잖아요."


라온의 질문에 매디는 빤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바로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하기 싫은 게로구나. 세상을 살아가려면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게 있는 법이야. 난 공부같은거 안하고 살았지만 넌 했으면 좋겠구나. 평생 식당 일과 농사일을 하고 살수는 없잖니. 네가 나를 만났듯이 다른 기회를 만날 수도 있는거야. 하지만 네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눈 앞까지 왔던 기회를 날릴 수밖에 없단다. 난 네게 그런 기회들을 놓치지 않게 하려는 것 뿐이야."


꾸벅꾸벅 졸던 라온은 손에 쥐었던 연필로 책에다 진한 선을 만들었다.


"라온! 내 가게에 있는 이상 이것도 일이라 생각해라!"


결국 화가 난 매디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라온은 한동안 잊고 있었다. 매디가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지. 그날 이후 라온은 눈이 감기면 제 허벅지를 꼬집어서라도 매디 앞에서는 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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