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살이 된 아란은 어느새 하슬라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커졌다. 제 아버지를 닮아 직각으로 떨어지는 넓은 어깨에 제복이 잘 어울렸다. 그에 반해 어릴 때부터 제대로 먹지 않았던 하슬라는 키가 커지기는 했지만 마른 몸에 가슴조차 나오지 않았다.
"다녀올게. 숙제 해놓고 있어. 선생님께 또 혼나지 말고."
"야!"
아란은 결국은 하슬라의 약을 올려놓고 나서야 정원을 나섰다.
'경비병들 훈련장에 연장이 있을 것 같은데…….'
아란은 조심스럽게 경비병 훈련장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창고로 향하던 그의 뒷통수에 천둥 같은 소리가 꽂혔다.
"아란! 어디 갔다 오는 거냐? 한참 찾았잖아!"
화가 많이 나 있는듯한 무들의 목소리에 아란은 그대로 몸을 돌려 아버지 앞으로 달려 나왔다. 아란의 덩치가 무들과 비슷해졌지만, 여전히 아버지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고 있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사의 훈련을 받는 아란은 이제 아버지와 실력이 비슷해지고 있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평가가 항상 그를 따라다니곤 했다. 아란은 언제라도 그만둘 생각으로 성의없이 훈련에 임했지만, 타고난 재능을 이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칼을 가리고 다니지 않는 이상 아란을 보고 무사를 연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햇빛 아래서 하는 훈련에도 하얀 얼굴은 잠깐 붉게 변할 뿐이었다. 더군다나 짧은 금발이 그 날렵한 턱선과 하얀 피부를 더 빛나 보이게 해줬다. 아버지의 까맣게 탄 각진 얼굴과는 대조적이었다.
"아버지, 잠시 도서관에 다녀왔습니다."
"항상 자리를 지키라고 했거늘. 쯧쯧쯧. 네게 맡길 일이 있으니, 폐하의 집무실로 가자."
아란은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는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폐하의 집무실에는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아란에게 폐하는 아버지의 뒤에서 눈을 살짝 치켜떠야 겨우 볼 수 있는 분이었다. 익숙한 2층 계단을 올라 도서관 반대편으로 꺾어 들어가자, 금빛 문양의 거대한 문들이 늘어서 있었다. 무들은 그중에서 아치형의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지기들이 문을 열어주었다.
바론은 창을 등지고 놓여있는 짙은 밤색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크기만 좀 클 뿐 아란이 집에서 쓰는 책상과 다른 게 없었다. 의자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하고 거대한 집무실을 상상한 아란은 조금 실망한 눈치였다.
"앉게나."
바론은 아란을 쳐다보며 소파 쪽을 가리켰다. 짙은 밤색의 가죽으로 감싼 소파도 별반 다를 게 없어보였다. 세 사람이 앉아서 안부를 묻는 동안 제나가 차와 다과를 내왔다. 제나는 곁눈질로 아란과 무들을 빠르게 번갈아 보고는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아들을 정말 잘 키웠어. 영특하고 지식도 뛰어난 데다 무예도 출중하다는 소문이 퍼져있더군."
"과찬이십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우리 사이에 왜 이러나. 껄껄. 그래서 말인데……."
바론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아란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아란이 하에라의 호위무사가 되어 주었으면 하네."
"네?"
아란은 폐하 앞이라는 것도 잊은채 고개를 들며 바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들이 제 아들의 얼굴을 손으로 내리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있을 요량이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은 아이입니다. 아가씨의 호위 무사라니요. 이 나라에 출중한 인물들이 많습니다. 명령을 거두어 주십시오."
무들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싶었다. 아란이 하에라의 가까워지기에는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일개 무사였던 무들이 권력의 중심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은 결혼밖에 없었다. 무들은 왕의 친구라고는 하나 그저 성의 경비와 왕의 경호를 책임지는 직책을 맡고 있을 뿐이었다. 더군다나 바론은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왕이었다.
자신이 시도했으나 실패했던 일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 말리라는 그의 욕심이 드디어 앞으로 한발짝 나아가는 순간이었다.
"나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하는 말이라네. 그동안 아란이 훈련장에서 훈련하는 모습도 계속 지켜보고 있었고 도서관에서 읽는 책의 목록도 알고 있었어. 그러니 하에라를 잘 부탁하네."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아란은 인자한 바론의 얼굴이 조금은 무서워지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성안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럼 명령 받들겠습니다."
무들은 바론에게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아란도 아버지를 따라 똑같이 바론 앞에 고개를 숙였다.
"고맙네. 하나밖에 없는 딸이라 제 어미가 너무 애지중지 키우다 보니 저만 아는 아이기는 하나 사리 분별 확실하고 영민하니 좋은 친구도 될 수 있을 것이야. 잘 부탁하네."
'그럼 하슬라는?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아란은 바론과 하슬라가 같이 있는 것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바론은 곧장 일어서서 장식장을 열어 장검 하나를 가져왔다. 무들과 아란도 뒤따라 일어서 바론 가까이 다가갔다. 무들은 바론이 칼을 들고 뒤돌자, 아란의 등을 떠밀었다. 아란은 얼떨결에 바론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받거라. 곧 공식적으로 후계자를 정하게 될 것이야. 앞으로 있을 모든 공식적인 일정에 네가 함께했으면 한다."
아란은 두 손으로 칼을 받아들었다.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칼을 옆으로 세우고는 한쪽 무릎을 꿇고 바론에게 경의를 표했다. 바론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무들의 입가도 미묘하게 올라갔다.
칼을 들고 집무실을 나오는 아란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이번에도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일이었다.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내일부터 나를 따라다니면서 아가씨의 일정과 동선을 점검하고 행사 준비를 해야한다."
"당장이요?"
"폐하의 명령이시다."
"네, 아버지."
"성안에선 대장님이라고 부르라고 몇 번을 얘기해야 하니!"
무들은 시무룩해진 아들을 위로해 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런 무들을 올려다보며 아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제 덩치가 아버지보다 커지고 힘이 세지면 아버지와 맞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루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폭력은 아란의 덩치가 커질수록 거세지고 있었다.
어렸을 적 처음 아버지에게 구타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서 정원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옆에는 자신은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아버지가 있었고 아란은 한 발짝도 그의 허락 없이는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