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란이 정원에 오지 않는 날이 계속되었다. 하염없이 기다리던 하슬라는 다행히도 제나를 통해 하에라에게 호위무사가 생겼고, 그 아이가 근위대장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아란은 한동안은 오지 못할 것 같았다. 당분간은 혼자서 이 공간을 독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그날처럼.
하슬라는 큰 담요를 들고는 정원으로 내려갔다. 비가 오지 않은 탓에 시냇물이 말라 있어 쉽게 건너편으로 갈 수 있었다. 어지러이 놓여있던 테이블과 의자는 모두 정돈되어 있었다. 아란이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옮겨 놓고는 주위에 있던 잡초들을 모두 뽑아 주었던 것이다.
마른 낙엽들 사이로 삐죽이 올라오는 새싹에 살짝 웃던 하슬라가 담요를 의자 위에 깔고는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사방이 고요했다. 작은 소리라도 날때면 하슬라는 저도 모르게 돌아보았다. 누군가와 함께 있던 공간이어서 그랬나. 혼자 있다는 사실이 어색해 자주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심심하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나무나 풀을 만지면서 아무 얘기나 주절거리다가 곧 그만두고는 정원을 빠져나왔다.
제나의 오두막에 들려 전날 놓고 온 책을 챙겼다. 수업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빠르게 움직여야 했지만,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가정교사는 여전히 무서웠고, 하슬라는 여전히 더뎠다. 아란이 오지 않아 숙제를 도와줄 사람도 없어서 선생님께 혼나는 일도 잦았다. 한숨을 쉬며 터덜터덜 계단을 오르는 하슬라의 시야에 유리처럼 빛나는 구두가 들어왔다.
'하에라.'
하슬라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눈을 더듬어 근처에 힐조가 있는지부터 살폈다. 다행히 힐조의 구두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익숙한 신발이 보였다.
"하슬라. 수업 가는 거야?"
"응. 아니, 네."
자신도 모르게 '응'이라 대답한 하슬라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정정했다.
"우리끼리 있을때는 편하게 부르자.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걸."
하지만 아란이 있었다. 그것도 하에라가 구두를 신고 계단을 내려갈 때 넘어질까 싶어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있는.
"어디 가는 길이야?"
하에라는 오간자 옷감으로 만든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계단을 한 걸음씩 내려올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치마가 꼭 오로라 같았다.
"어머니께서 만찬장에서 우아하게 계단을 내려가야 한다잖아. 이런 걸 신고서. 그래서 연습하고 있었어. 다행히 아란이 도와줘서 이제는 안 넘어져."
"다행이다. 오늘따라 예뻐. 하에라."
예쁘다는 소리에 하에라는 망사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웃었다. 항상 입을 크게 벌리고 웃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만찬장에서의 연습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란이 있어서? 하슬라는 자신도 모르게 아란에게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아란은 입 모양으로 잘지내냐고 물었고, 하슬라는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다행히 하에라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나 가볼게. 연습 잘하고."
"선생님께 혼나지 말고 좀 잘해봐."
후계자 수업을 받으면서도 하에라는 여전했다. 하지만 익숙한 하슬라는 그냥 웃고 넘겼다. 하루하루 하에라와 멀어지는 게 조금은 씁쓸했지만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으므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하에라와 함께 있는 아란을 자주 마주할수록 가라앉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친구인데.'
아무 일도 아닌 일로 웃고 있는 둘을 볼 때마다 하슬라는 자신을 달래야만 했다. 둘이 먼저 친구였다고. 앞으로도 아란은 하에라가 부를때마다 달려가야만 한다고.
봄이 되고 새싹이 나기 시작하면서 돌아온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적당히 부는 바람과 따뜻한 햇살 덕분에 낮잠을 자기에 최고의 조건이라고 생각한 그녀는 엎드려 쿠션을 두팔로 끌어안아 뺨에 대고는 눈을 감았다. 몰려오는 졸음을 깨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눈을 감은 채 이리저리 뒤척이던 하슬라는 결국 짜증을 내면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잎이 많이 나오지 않은 가지 사이로 비추는 햇빛 때문이라고 원망하던 하슬라는 자작나무 숲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란이 보이지 않은 지 한 달이 넘었다.
후계자로서 첫 공식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하에라와 그 옆에서 호위를 맡게 된 아란. 그리고 그 행사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하슬라.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던 하슬라가 갑자기 바론의 정원으로 뛰어갔다. 바론은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바로 옷을 갈아입고 정원으로 나가곤 했다. 삽과 쟁기를 들고 흙을 다지고는 씨앗을 심고 비를 내렸다. 바론의 정원에는 항상 아름다운 꽃들과 울창한 나무들로 가득 찼다. 그 모습을 보았던 게 생각난 하슬라는 바론의 정원으로 가서 도구들을 넣어두는 창고 문을 당겨보았다. 다행히 잠겨있지 않았다. 컴컴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창고 안은 환하고 쾌적했다.
각종 크기의 삽과 쟁기에 낫까지 일렬로 정리되어 있었다. 다른 벽에는 씨앗이 작은 유리병에 담겨 선반에 빼곡히 들어 있었다. 하슬라는 삽을 들었다가 옆에 걸어놓은 호미를 챙기고 장갑을 가지고는 창고를 빠져나왔다.
느티나무와 자작나무 숲 사이에 평평한 땅을 일구기로 결심한 하슬라는 장갑을 손에 넣어보았다. 바론의 큰 손에 맞는 장갑이 하슬라에게는 너무 컸다. 하지만 맨손으로 잡초를 뽑았다가는 손에 생채기가 날 게 뻔했다. 호미로 땅을 찍어서 들어 올린 후 다른 손으로 그 풀을 뽑아 올렸다.
'나 꽤 잘하는데.'
생각보다 잘 뽑히는 잡초 때문에 뿌듯해하던 하슬라는 1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주저 앉아버렸다. 쭈구리고 있던 탓에 발목이 시큰거리고 손목도 아파왔다. 장갑을 손목 위까지 올렸지만, 자꾸 내려오던 탓에 팔에 생채기가 잔뜩 나 있었다. 힘겹게 일어나 뒤를 돌아보니 꽃 몇 개 심을 공간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슬라는 장갑을 벗어 땅에 패대기를 친 후 씩씩거리며 느티나무 아래에 가서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짜증이 나는지 자기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감정이 들쭉날쭉 요동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슬라는 주먹을 쥐고 가슴을 쿵쿵 두드려 보았다. 이렇게 해서라도 가라앉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풀을 스치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뒤꿈치가 땅에 닿은 후 천천히 앞으로 중심이 옮겨지면서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하슬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움직이지도 않았다.
깜짝 놀라게 해 주러 살금살금 다가오던 아란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는 하슬라를 보고는 마음을 바꿔 그녀 옆에 조용히 앉았다.
"이거 네가 한 거야? 공부가 안되니 차라리 농사일을 배워보려고?"
금방이라도 화를 내며 얼굴을 붉힐 줄 알았지만, 아무 반응이 없는 하슬라를 보자 아란은 무안해져 괜히 호미를 들었다 놓았다.
하슬라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아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 달 만에 마주한 얼굴이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이상했다. 반가울 줄 알았는데, 반가워서 쉴 새 없이 재잘거릴 줄 알았는데 마음 한편이 무거워졌다. 아란은 눈으로만 자신을 훑는 하슬라가 낯설었다. 하슬라의 눈동자가 아란의 제복에 머물렀다 옆에 놓은 칼에 멈췄다.
"아란, 나 검술을 가르쳐줘."
"뭐?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 하슬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란은 혹시 하슬라가 누구한테 맞기라도 한 양 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아니, 네 말대로 난 공부는 아니잖아. 나도 별로 하고 싶지 않고. 보다시피 농사일에도 소질이 없는 것 같네. 그러니까……."
이번에는 아란이 아무 말도 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하슬라를 보고 있기만 했다. 정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얼마 전만 해도 서로 장난을 치면서 놀던 우리였는데. 아란은 칼을 챙겨 일어났다.
"안돼. 네가 이러는 이유를 알기 전까지는 못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
행사 준비의 막바지가 되자 잠시 틈이 생기게 된 아란은 생각보다 몸이 먼저 이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반갑게 맞아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모습에 화가 난 그는 평소와는 달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칼집이 스치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하슬라의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는 걸 본 아란은 한숨을 쉬고는 정원을 빠져나갔다.
하슬라도 자신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가슴에는 울음이 가득찼지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예전과는 완연히 다른 감정이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아란의 잘못은 아니라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