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일어서던 하슬라가 휘청였다. 아침 식사 이후로는 물 한 모금도 안 먹었다는 게 생각났다. 정원을 빠져나온 그녀는 방을 지나쳐 주방으로 갔다. 제나가 밀가루 반죽을 손으로 열심히 치대고 있었다.
하슬라는 의자에 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그 모습을 본 제나가 밀가루가 잔뜩 묻은 손을 씻지도 않고 달려왔다.
"아가씨! 이게 무슨 꼴이에요? 온몸이 흙투성이에 팔에 그 상처들은 또 뭐예요? 어디서 무슨 일을 하시다가 오신거에요?"
처음엔 놀라서 하슬라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던 제나는 끝내 손등을 입가에 가져가며 웃고 말았다.
"어린애처럼 흙장난이라도 하셨나 봐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됐고. 아가씨는 화가 나신 거겠죠. 차라리 저한테 가르쳐 달라고 하지 그랬어요."
제나는 하슬라 앞에 무릎을 감싸고 앉아 고개를 외로 꺾어 그녀와 눈을 맞추려 애썼다. 제나는 하슬라가 그저 가여웠다. 인간 세상에서 어떻게 자랐든 여기 와서라도 사랑을 듬뿍 받았으면 좋았으련만. 그도 아니면 최소한 자식을 가진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도리라도 해줬으면 했다. 하지만 바론은 하슬라가 성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15살, 사춘기가 시작되려는 나이였다. 막무가내로 제 감정을 앞세워 고집도 부리고 토라져도 보고 짜증도 한껏 부려야 할 나이였다. 하에라가 제멋대로 굴긴 하지만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하루하루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하슬라는 그저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하슬라가 폭풍처럼 몰아치는 저 감정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감당해야 할지 모르는 건 당연했다.
"아가씨, 일단 씻고 맛있는 거 먹어요."
제나가 일으키자, 하슬라는 못 이기는 척 일어나서 우물가로 나갔다. 차가운 물이 풀에 베인 상처에 닿자 쓰라렸다.
'이깟 상처 따위.'
하슬라는 더욱 세게 문질러 흙을 닦아냈다. 세수 하고 머리에 물을 흠뻑 적시고나자 정신이 들었다.
제나는 어느새 하슬라의 방에서 꺼내 온 옷을 들고 옆에 서 있었다. 하슬라는 민망했지만,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런 하슬라가 그저 안쓰러웠던 제나는 하슬라가 제일 좋아하는 샌드위치를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왜 그렇게 봐? 뭐 묻었어?"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베어 물던 하슬라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하지만 음식을 씹는 걸 멈추지는 않았다.
"몰랐어요? 입가에 소스 다 묻히고 먹고 있으면서."
그제야 하슬라는 빙긋이 웃었다. 아직 어린아이였다. 바론은 저 아이를 도대체 어쩌려는 걸까.
"제나, 나 막 짜증이 나고 가슴이 답답해. 그런데 이유를 모르겠어. 이유를 알아야 나도 대처를 할 텐데……."
하슬라는 순간 아란이 생각나 말을 흐렸다. 아무리 제나지만 아란과 정원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때로는 이유를 몰라도 되는 일이 있어요. 짜증이 나면 내면 되고 울고 싶으면 울면 되잖아요. 답답하면 크게 소리를 질러봐요. 아니면 아무도 없는 곳에서 물건을 마구 던져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어차피 한때에요. 나도 그랬고 다른 사람들도 다 겪는 일인걸요."
"진짜? 제나도 그랬다고?"
"그럼요. 아가씨 나이가 되면 자연스럽게 겪게 되는 일이에요. 앞으로는 고민하지 말고 나한테 와서 말해요. 아가씨를 위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알았죠?"
"응."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하슬라는 샌드위치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여전히 속은 답답했고, 감정이 널뛰듯 오르락내리락했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니라는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가버린 아란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란은 이런 감정을 겪지 않았었던 걸까. 아란에게 섭섭해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주방을 나와 제 방으로 터덜터덜 걸어가던 하슬라는 하에라와 지나가는 힐조를 발견하고는 멈춰 섰다. 숙인 고개 아래로 하에라의 손을 꼭 붙든 힐조의 손이 보였다. 하에라는 하슬라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힐조 앞에서 같이 손을 흔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 곧 하에라는 그녀가 받들어야 할 군주가 될 몸이었다. 그런 하슬라의 태도가 오래간만에 마음에 들었는지 힐조는 그녀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고 지적해야만 하슬라를 지나쳤던 그녀였다.
하에라와 힐조가 지나간 뒤로 아란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하슬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란의 굳은 표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하슬라는 모든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