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부터 하슬라는 정원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 주방으로 향했다. 차마 그쪽으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를 찾는 대신 주방으로 가서 식재료를 다듬고 제나를 도와 음식을 장만했다.
제나는 식탁 위에 마법을 부리는 사람 같았다. 그녀의 손이 닿은 음식은 항상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바론이 제나를 주방 시녀장에 임명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은 무슨 음식을 만들 거야?"
이제 하슬라도 하루하루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다행히 제나가 가르쳐주는 대로만 하면 하슬라도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사과파이 만들까 하고요. 사과가 잘 익었잖아요."
"응, 그럼 내가 사과 따올께. 바구니가 어디 있더라."
하슬라는 바구니를 들고는 주방 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바론의 과수원에 있는 사과는 일 년 내내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향긋한 사과 향이 한 번에 밀려와 기분이 좋아졌다. 사다리를 가져와 가장 많이 열린 나무 옆에 대고는 조심조심 사과를 따고 있었다.
"하슬라! 여기서 뭐 해?"
하에라가 사과나무 사이로 빠르게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슬라는 순간 사다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는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아악. 하……."
엉덩이로 넘어지는 바람에 다른 데는 다치지 않았지만, 너무 아파서 일어설 수가 없었다.
"하슬라, 조심해야지."
하에라가 다가와 하슬라의 한쪽 팔을 잡아 위로 당기자 바로 뒤따라온 바론이 다른 팔을 잡아 일으켰다. 순간 몸이 위로 붕 뜬 하슬라가 균형을 잡지 못하고 다시 한번 넘어지고 말았다. 하에라는 뭐가 재미있는지 깔깔대고 웃었지만, 하슬라는 이대로 땅으로 꺼져버렸으면 했다.
바론은 천천히 다시한번 하슬라를 일으켜주고는 사과 바구니도 세워주었다.
"사과를 따고 있었나 보구나. 올해는 유난히 더 맛있게 익은 것 같더구나. 그렇지 않니? 하에라."
"네, 아버지."
하슬라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웃고 있는 부녀 사이를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런데 사과는 왜?"
하에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하슬라에게 물었다.
"제나가 사과파이를 만든다고 해서. 같이 만들려고."
"잘됐다. 어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디저트인데. 맛있게 만들어줘, 하슬라."
물론 알고 있었다. 저렇게 말하는 하에라의 말 속에 악의라고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다는 것을. 하에라는 말 속에 무언가를 감추며 말하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하슬라는 속이 뒤틀리고 있었다. 다행히 목구멍을 통과한 신물이 입안으로 넘어오기 전에 바론과 하슬라는 과수원을 빠져나갔다. 쓴 물이 다시 목구멍으로 내려가고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제나는 바구니에 가득 담은 사과를 힘겹게 가져오는 하슬라를 보자 한걸음에 달려와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하슬라도 그런 제나를 보자 다시 마음이 편안해졌다.
'사과 파이를 만든다라…….'
바론의 머릿속에서 과수원에서 마주쳤던 하슬라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 제나에게 하슬라를 부탁했던 건 믿을만한 사람이어서였지 주방 일을 시키라는 말은 아니었다. 바론은 제나를 불러 다그칠까 하슬라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봐야 할까 고민중이었다.
하슬라가 어렸을 때는 일이 쉬웠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주는 하슬라가 고맙기까지 했다. 비록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교사들과 사소한 다툼이 있긴 했지만. 힐조를 거스르지 않고 수업을 빠지는 일도 없었으며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지내주었다. 하슬라는 어느새 하에라만큼 커져 있었고 조금 있으면 성인이 될 터였다. 이제 숨기고 살 수만은 없었다. 힐조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하에라가 공식적으로 후계자가 되면 힐조도 마음이 누그러질 것 같았다. 그날을 위해 하슬라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고 지위를 부여해 주어야 했다.
바론은 또한번 비슬에 대한 분노를 느끼며 하슬라를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잘 지내고 있니? 하슬라."
"네. 폐하."
"둘이 있을 때는 아버지라 부르래도."
바론은 여전히 부드러운 저음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건 하슬라의 마음이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폐하."
바론은 삐딱한 하슬라의 말에 살짝 놀랐지만, 곧 예의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도 이제 곧 16살이 되겠구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잖니."
"전 제가 태어난 날도 모르는걸요."
"이곳에 온 날이 생일과 다를 게 없지 않니?"
"왜 부르셨나요? 폐하."
"이 곳에서는 네 나이쯤 되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하곤 한단다. 하에라도 그렇고 아란도 그렇고. 그러니 너에게도 할 일을 주고 싶은데, 이왕이면 네가 원하는 것을 주고 싶어서 불렀단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요?"
하슬라는 한 번도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평생 성 한구석에서 살아갈 줄 알았다. 어차피 공식적인 자리에도 못 나가는 딸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그래, 넌 내가 널 내버려뒀다고 원망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단다."
'언제나 똑같은 변명.'
하슬라는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바론의 말에 가시 돋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저절로 나왔다. 그전까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이것도 누구나 겪는 일인가? 아니면 내 마음이 변한걸 까?
"성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주고 싶은데. 도서관에서 일해도 괜찮을 것 같고. 내 일들을 보조하는 일들을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떠니?"
"선생님한테 들으셨을 텐데요. 저 수업이 엉망인 거. 그렇게 머리 쓰는 일 못할 것 같아서요."
"그렇구나. 하지만."
"주방에서 일하게 해주세요. 디저트를 만들고 싶어요. 성안에는 행사가 많이 있잖아요. 앞으로 하에라를 위한 만찬도 계속 생길 테고요."
하슬라는 바론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렸다. 감히 왕의 말을 끊다니 하슬라는 순간 후회했지만, 까칠한 마음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안된다. 어떻게 내 딸을 그런 곳에서 일하게 할 수 있겠니?"
하슬라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공부를 시켜주는 것으로 딸에 대한 대우를 해줬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차피 지금껏 신경 쓰지 않으셨잖아요. 앞으로도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론은 하슬라에게서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슬라를 자연스럽게 공식석상에 나서게 하려 했지만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삐딱한 15살짜리 아이와 더 이상 의미없는 말다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알았다! 하지만 언제든지 너를 그만두게 할 수 있다는 것만 알아두거라.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만이다. 대신 지금처럼 수업도 받아야 하고 조용히 지내야 한다."
바론의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지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하슬라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입혀주고 재워주고 교육까지 시켜줬는데 반항하는 딸이 얼마나 같잖았을까. 하슬라는 차라리 이렇게 대해주는 게 마음이 편했다. 갑자기 아버지 노릇을 하는 바론이 미웠다.
허리를 크게 숙여 인사를 한 후 하슬라는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 앞으로 나 있는 복도는 줄지어 창문이 늘어져 있었다. 벽 사이사이에 있는 창문을 통해 보는 경치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새싹 사이로 피어나는 꽃들과 바람이 불 때마다 풍겨오는 향기. 하슬라는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제나, 제나!"
하슬라는 그 길로 주방으로 내려가서 제나를 찾았다.
"나 이제 여기서 일할 거야. 디저트 만드는 일을 담당하기로 했어. 폐하께서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폐하께서요? 설마요."
"뭐, 내가 한다고 먼저 얘기하긴 했어. 나보고 도서관에서 일하거나 저 답답한 집무실에서 일해보라고 하잖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정말 그게 싫으신 거에요?"
제나는 하슬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사실은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던 거겠지. 그 얘기를 바론이 꺼냈다는게 더 싫었을 테고.
"나 뭐부터 할까?"
제나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는 하슬라를 내려다보았다. 어차피 자신이 반대한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럼 오렌지 콩피를 만들어야 하니까 저 오렌지 손질하는 것부터 배우세요."
"나 이제 디저트 담당인데 이런것까지 해야 해?"
"그동안은 놀러 온 김에 저 도와준 거고요. 이제부터는 제 보조 역할부터 하셔야 해요. 재료 손질부터 배워야 특성을 알아 서로 어울리는 디저트를 만들 수 있어요. 싫으시면 도서관에서 일하신다고 하시던지요."
"알았어."
말만 그렇게 했을 뿐 하슬라는 빠른 동작으로 오렌지를 씻고 적당한 크기로 과육이 붙은 껍질을 얇게 썰기 시작했다. 그전부터 손이 야무지다고 생각은 했지만 처음 해보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꽤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었다. 제나가 한번 시범을 보여주거나 설명해 준 일을 거의 완벽하게 해냈다. 그럴 때면 타고난 피는 못 속이는건가 싶기도 했다. 제나는 그 옛날 바론이 주방에서 만들어내던 그 요리들이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