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론은 선왕과 함께 비를 내리게 한 날이면 어김없이 주방을 찾았다. 제 방에서 명령만 내리면 진수성찬이 저절로 나올 텐데 굳이 직접 요리를 하곤 했다. 당시 주방 보조로 일하던 제나는 그런 바론을 멀리서 힐끔힐끔 보기만 했다. 감히 다음 왕이 될 후계자 근처에 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날도 바론은 초췌한 얼굴로 주방에 혼자 들어왔다. 점심 식사가 끝나고 디저트까지 나간 후라 주방은 난장판이 되어있었지만, 바론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속에서 재료들을 찾아내 능숙한 솜씨로 다듬었다. 그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던 제나는 바론이 무슨 음식을 만들어낼지 궁금해졌다. 점심식사로 나간 연어구이와 샐러드가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일까?
바론은 바질을 절구에 넣어 찧고 식초와 올리브유를 넣어 섞었다. 토마토도 잘게 잘라 접시에 담아낸 후에 삶아낸 파스타를 담은 후 바질로 만든 소스를 뿌렸다. 제나는 그 음식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저런 이상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단 말이야. 왕이 되려면 저래야 하는 건가.'
제나가 질겁을 하며 뒤로 돌아나가려는 찰나 바론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이리 나와."
바론은 포크로 파스타를 크게 떠서 입에 넣었다. 우걱우걱 씹는 소리가 주방에 울려 펴졌다. 제나는 손을 바들바들 떨며 바론의 옆에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먹어봐."
"네?"
제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바론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았다.
"자."
바론은 옆에 있던 포크를 제나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쥐고는 파스타 한 가닥을 들어 겨우 입에 넣었다.
"어때?"
"맛…… 있습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상큼하고 고소한 소스가 면과 잘 어울려 정말 맛있었다.
제나의 대답에 기분이 좋아진 바론은 나머지 파스타를 입에 털어 놓고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넌 여기서 무슨 일을 해?"
"음식이 나가면 뒷정리와 설거지를 하고 식재료들을 손질하는 일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난 내가 직접 해 먹는 요리가 좋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주방에 올 거야. 그러니까 네가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어."
"명령만 내리세요."
"내가 여기에 오면 다른 일 하지 말고 나를 도와줘. 주방에 내려올 때마다 요리도구나 재료를 찾지 못한 경우가 많거든. 내가 올 때마다 사람들이 없더라고."
바론은 정말 몰랐던 것 같았다. 자신이 내려올 때마다 사람들이 요령껏 주방을 빠져나갔다는 것을. 그냥 놔두거나 도와드렸다가 선왕께서 벌을 내리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하지만 제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런 일쯤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바론이 해내는 요리들이 궁금하기도 했다.
"오늘도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럼, 다음에 봐."
제나는 바론이 좋은 왕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성의 말단 문지기조차 자신을 하대했었는데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실 분이 자신에게 부탁을 해왔던 것이다.
바론은 그 후로 자주 주방에 들렀다. 처음에는 요리만 하더니 나중에는 식재료들에 대해 자세하게 물어왔다. 샐러드부터 디저트까지 바론은 다양한 요리들을 할 수 있었다.
"어떻게 그렇게 다양한 요리들을 해내세요? 태어날 때부터 요리사였던 것처럼요."
"도서관에 요리책들이 많이 있어. 그것들을 보면서 먹고 싶거나 해보고 싶었던 걸 여기 와서 해보는 거야."
"와, 그걸 다 외워서요?"
"그럼."
제나는 수많은 요리법이 적힌 책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것들을 모두 외운다는 바론의 말은 더욱 놀라웠다. 레시피를 수첩에 적어서 매번 봐야 하는 제나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 같았다.
"식재료와 향신료를 이해하면 그것들이 서로 만났을 때 어떤 맛이 날지 자연스럽게 알게 돼. 그러면 레시피들을 다 외울 필요가 없어. 이 단계에서는 이게 들어가야겠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돼."
"전 잘 모르겠어요."
제나 덕분에 재미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바론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내가 너에게 선물을 주고 싶은데 혹시 바라는 게 있어? 지금 당장 원하는 물건도 좋고 아니면 내가 왕이 되었을 때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던가, 뭐 그런 거."
"흠……."
제나는 한참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무얼 말해야 하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거나 말하기에는 아깝기도 했다.
"지금은 없는 것 같아요. 대신 나중에라도 원하는 게 생기면 그때 들어주세요."
"그래. 그렇게 하자. 대신 딱 한 번이야."
"네."
바론은 새끼손가락을 제나에게 내밀었다. 제나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왕이 되실 분인데 감히 손가락을 내밀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없던 일로 할거야."
바론이 짐짓 으름장을 놓고 나서야 제나는 그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가 바로 빼내었다. 기억해 주면 좋은 일이었고 아니어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날 이후 바론은 주방에 내려오지 않았다. 선왕께서 갑자기 돌아가셨고, 대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제나는 어린 왕을 위해 그동안 그가 했던 요리들을 되짚어 보았다. 최대한 비슷한 맛을 내려고 노력했고, 바론이 웃으면서 먹어주기를 바랐다.
제나가 주방을 나와 성안을 돌아다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식재료 준비를 위해 과수원과 밭을 오갈 때면 가끔 바론을 멀리서 보곤 했지만, 아는 체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직접 음식을 가져다드릴 때조차 그녀는 실수로라도 바론에게 먼저 말을 건네지 않았다. 어쩌다 바론이 말을 걸어와도 필요 이상의 대답을 하지는 않았다.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